<이색적인 바위가 인상적인 터키 괴레메의 풍경. 바위마다 동굴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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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야간 버스 여행에서, 그것도 뒷좌석에 앉아 있을 때 수면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침대에서처럼 평온한 잠에 빠져들지도 못하고 아침까지 끝내야 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불면의 밤을 보낸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식과 정신 그리고 상상의 세계는 수면과 현실 세계 사이에서 자신에게 고유한 상상을 창출한다. 그 세계는 때로는 이 둘을 합친 매우 특별한 곳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터키의 버스 여행자들에게 고유한 일종의 생활 형태이다. 이렇게 수면 상태도 아니고 깨어 있는 상태도 아닌 의식 상태를 나도 경험했었다(이난아 역)'라고 오르한 파묵은 말한다. 필자도 이동하는 동안에 앙카라에서 반공이데올로기가 국민들을 어떻게 의식화했는지를, 자신이 국가의 통제이데올로기에 어떻게 길들여졌는지를 생각하면서 잠깐 동안의 선잠과 깨어 있는지 아닌지를 모르는 흐릿한 상태의 불규칙적인 반복을 경험했다.
괴레메는 소박하고 작은 시골 마을이다. 카파도키아 전체가 에르지예스 화산과 핫산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으로 형성된 응회암층이 수백만 년 풍화와 침식 작용으로 변화된 것이다. 카파도키아는 자연 그 자체이다. 그 중심지가 괴레메이다. 카파도키아의 광대한 지역을 혼자서 도보로 다닐 수 없기 때문에 괴레메에서 여행자들은 투어들, 로즈 계곡 투어, 그린 투어, 레드 투어와 같은 테마 투어, 도보 투어, 오토바이 투어, 스쿠터 투어, 발룬 투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카파도키아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기독교도들이 로마와 이슬람의 종교적 탄압을 피해서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교회와 수도원을 지어서 신앙생활을 한 곳이라는 말을 받아들인다면 이곳에서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기독교 박해의 역사가 되짚어질 것이다.
그 역사의 여정은 동굴로 된 교회 밀집 지역에 울타리를 쳐서 만들어 놓은 괴레메 야외 박물관을 순례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성 바실리우스 교회, 엘말르 교회, 성 바르바라 교회, 일란르 교회, 수도원 식당 등이 있다. 이 교회들의 벽면에는 기독교 성화가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다. 프레스코화는 '방금 회를 칠한'이라는 이탈리아어로서, 완전히 마르지 않는 석회벽면 그림을 그려서 물감이 그 벽 속으로 스며들어가도록 하는 기법인다.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교회들의 기독교 성화는 대부분 고난과 부활에 관련된 것들이다. 곧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은 기독교들에게는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한복음 1장 12절)에서와 같이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 믿음은 바위를 파서 산 전체를 동굴교회와 동굴집으로 만든 차우쉰 올드 빌리지, 수도사의 골짜기로 알려져 있는 파샤바, 지하에 굴을 파서 조성한 30여 개의 지하 도시들 가운데 여행자들에게 개방된 데린쿠유와 카이마클르, 60여 개의 교회와 수동원이 들어서 있는 으흘라라계곡 등에서도 재확인 할 수 있다.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 신앙에 대한 절대 믿음은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절대 신앙이 현실적으로 드러난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십자군 전쟁은 11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기까지 200년에 걸친 종교전쟁이지만 신의 이름을 빌어서 인간의 욕망으로 벌인 종교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십자군 이야기'에서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말한 것처럼 '옳은 것만 말하는 신이 바란 일이니 옳은 전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가 후퇴한 뒤에도 옳은 전쟁만 남았다. 아니 적어도 이 정도는 남기고 싶다고 인간이 생각했기 때문에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에 맹위를 떨치고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 남아 전쟁을 이끌어 내는 측이나 이끌려 나간 측, 모두가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송태욱 역). 아니 현재진행형의 종교전쟁, 그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 옳은 것과 옳지 않는 것 간의 고민 등 그 자체가 2001년의 9·11 사건을 문명의 충돌로, 2011년 재스민 혁명을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혁명으로 보는 서구적 시각이 아닐까?
'이슬람의 눈으로 보는 세계사'에서 타밈 안사리는 말한다. '내 생각에는 현대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 갈등을 문명의 충돌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만일 그 진술이 우리는 서로 다르니 둘 중 하나만 남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면 말이다. 그보다는 서로 맞지 않는 두 줄기의 세계사가 교차하며 발생한 마찰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 무슬림은 어딘가로 향하는 한 무리다. 유럽인과 유럽에서 분가한 사람들은 다른 어딘가로 향하는 한 무리다. 그런데 두 무리의 사람들의 길이 교차하면서 부딪히고 부서지는 사건들이 벌어졌으며 그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류한원 역).
여전히 진행 중인 종교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가?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우리 고유문화를 중심으로 불교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근대에 이르러 기독교문화를 받아들였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서구와 기독교 문화의 영향 아래 형성된 이슬람에 대한 편견들, 예컨대 신정일치, 왕정체제 및 권력세습, 이슬람근본주의 및 테러, 일부다처제 및 여성억압 등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남북분단으로 형성된 이념 갈등, 지역문제로 형성된 지역 갈등, 종교문제로 형성된 불교와 기독교 간의 갈등에 단일문화와 다문화 간의 갈등이 겹쳐지는 것이 아닐까? 그 갈등을 자연의 품 속에서 치유할 수 할 수 있을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에서 자연의 품 속에 숨어 있는 기독교의 문화유산을 보면서 종교박해의 역사가 종교전쟁의 역사로 진행 중임을 느낀다. 그 느낌을 떨쳐 버리고 자연 속에 파묻혀 볼까? '자연은 우리에게 지식의 씨앗은 주었지만, 지식 그 자체는 주지 않았다'는 세네카의 충고를 받아 들여서 다시 배낭을 메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자.
# 길에서 만난 여행객, 누구나 친구가 되고
'풍경은 연약하다. 풍경은 순간으로만 있다. 그것은 덧없이 사라진다. 시시각각 빛은 변화하는 것이다. 풍경은 언제나 단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풍경이란 나의 세계(또는 지각)의 모습이 아니라 내 자신의 모습이다. 산다는 것은 풍경을 가진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허만하 산문집 '낙타는 십리밖 물냄새를 맡는다'). 지난 일일 투어에 지쳐 숙소에서 쓰러지듯 단잠을 자고난 새벽, 여행자들은 풍경을 가지러 숙소를 나선다. 지난 밤의 뒤떠들음을 먼동의 밝음으로 씻어내고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오른다면 영혼은 얼마나 맑아질까? '맑은 영혼은 기어서라도 길 끝에 이르고/ 그 길 끝에서/ 다시 스스로의 길을 만든다/ 지도의 한 부분으로 사라진다'(허만하의 시 '낙타는 십리 밖에서도').
언제 보아도 새롭게 다가서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바라보면서 길이 난 곳으로 오르락내리락 하거나, 덤불 사이로 길을 만들어 다니다가 스쳐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해맑은 웃음으로 인사를 하거나 푸른 하늘에 하얀 길을 수놓고 있는 구름과 날아다니는 새들의 자유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렇게 산길을 다니다가 잠시 쉬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친구가 된다. 작은 승용차 뒤칸과 나뭇가지에 천막을 치고 그늘을 만들어 홀로 헤매는 여행자들에게 목을 축이게 하는 사람을 만나면 더욱더 친한 친구가 된다. 그 터키 노인은 홀로 자동차여행을 하면서 물이나 과일 쥬스, 손수 만든 작은 소품을 팔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물이라도 한 잔 마시면, 서로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된다. 전혀 알아 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말하는 노인의 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읽어갈수록 바람을 벗하여 자연 속으로 정처없이 돌아다니고 싶어진다. 언제 그렇게 될까? 여행을 왔어도 인터넷을 하고 메일을 열어 보면서 언제 모든 걸 벗어던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