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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샤와의 만남

2005.01.02 12:27

정근태 조회 수:992 추천:12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12월 11일 안식일, 내가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중부 산업 도시인 나보이시(市)의 재림 교회에서였다. 그날은 나보이시에 재림 교회가 새로 건축되고, 헌당되는 날이었다. 전날, 바실리 담임 목사의 초청으로, 내가 일하던 타쉬켄트 교회에서 460여 km 정도 떨어진 나보이 시로 약 7시간여의 자동차 여행 끝에 도착했고, 여러 기념 행사와 예배들이 진행되고있었다.

여러 행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한 말쑥한 젊은이를 보게 되었는데 그는 개인용 video로 열심히 교회 건물과 예배, 또한 행사들을 녹화하고 있었다.(나중에 물어보니, 그 video는 자신의 것이 아니였고, 교회가 철거된 아쉬하바트교회 교우들에게 이곳의 형제들을 보여주기 위하여 촬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동행한 사람들로부터 그가 바로 투르크메니스탄의 아쉬하바트교회의 목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었다.

파웰 페도도프 목사, 그는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젊었으며, 여러 가지 핍박과 정부의 압력 속에서 꾿꾿하게 재림 교회를 돌보고있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앳된 동안(童顔)의 젊은이였다.
행사가 마쳐지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한구석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나는 왜 저들이 모여있는지 궁금하여 사람들을 헤치고 누가 있는가 보았는데, 바로 빠샤(파웰 페도도프 목사의 애칭)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그는 수일전 자신의 교회 건물이 투르크메니스탄 정부에 의하여 무너지는 과정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약 40여장의 사진을 한 앨범에 담아 보여주고 있었으며, 또한 자신이 섬기던 교회가 정부에 의하여 철거되기까지의 과정들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는 신축, 헌당되는 나보이 교회를 바라보며 매우 부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당신의 나라에서는 교회를 부수었는데, 여기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가 새로서는 것을 보는 감회가 어떤가?"고 눈치없는 질문을 하자 그의 얼굴에는 다시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여러 형제들과 이야기하던중 내가 잠시 이야기할 것을 요청하자 그는 나와 함께 따로 이야기할 시간을 만들었다.

『아쉬하바트의 재림 교회는 구 소련이 붕괴되기 이전부터 등록될 교회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투르크메니스탄이 독립한 이래에 1992년에는 건축허가까지 받은바 있다. 그러나 1994년, 새로운 종교법이 발효되면서 정부는 최소한 500명의 등록 신자의 이름과 그들의 여권번호(주민등록번호와 같음. 구 소련 지역은 별도의 주민등록증 없이 모든 국민이 성인이 되면 여권을 받는다.)를 요구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로 핍박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들의 이름과 번호를 제출할 수 없다.) 그러나 재림교회는 이 요건을 충족하여 재등록을 요청했음에도 재등록이 거절되었고, 빠샤 목사와 신자들은 괴롭힘을 당했으며, 예배는 불법집회로 간주되어 참석자에게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래도 교회가 계속 운영되자, 정부 당국은 결국 교회를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교회가 있는 곳을 도로용으로 수용한다는 명목으로 아무 보상 없이 교회를 강제 철거하였다. (그러나 8개월이 지난 후까지도 도로건설에 관한 아무 조짐이 없이 잔해들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당국에서 철거 업자를 선정할 때 3개 업체에서 "하나님의 집을 부수는 일"이라며 거절하여 네 번째 업자가 철거작업을 시작한 일, 교회가 철거되던 날 몇몇 교우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여성도가 "하나님의 집을 부수는 저들에게 이 집이 하나님의 집임을 알게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하자, 대형추로 원심력을 이용해 교회를 부수던 대형 크레인의 철골 부분이 부숴져버려 기도소리를 들으며 코웃음치던 기사가 더 이상의 작업을 거부하고 손해를 무릅쓰고 돌아가 버린 일 등은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그는 그후로 계속하여 교인 가정을 전전하며 교회를 세 그릅으로 나누어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했으며, 빠샤는 교회가 철거되는 사진중 중요한 장면이 담긴 4장의 사진과 디지털사진 13장을 건네주며, 이 일을 되도록 많은 곳에 알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하실 것임을 이야기하며 첫 만남을 마무리했다.

해가 바뀐 2000년 1월 17일 오후, 타쉬켄트에 머무르고 있던 나는 빠샤 목사가 타쉬켄트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숙소를 수소문하여 합회 재무부장 댁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밤이 늦었지만 그를 방문하여 9시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그간의 상황을 전하며 “핍박으로 인해 교회와 함께 있는 사택이 파괴되어 지금은 아내와 함께 성도들과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고 있는 상황”이라며,“핍박의 증거가 확실하고 지금도 언제 체포되거나 추방될 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로 부터 망명을 권유 받았으나, 내가 떠나면 교회와 성도들은 어떻게 되겠느냐”며 다른 나라로의 이주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 만남에서 작년에 일어난 교회 철거 사건을 널리 알려줄것과 재정적인 도움이 간절히 필요함을 이야기했고 두 번째의 만남을 마무리 했다. 이때를 전후해서 인터넷 사이트 영원한 복음과 재림교회 홈페이지, 재림 신문등을 통해 이 소식이 한국에 널리 전해졌으며, 이후 서울 위생병원 원목실, 서울삼육 중학교 도르가회, 동성삼육 중학교, 동중한 합회 문막지구, 캐나다 토론토 서부 한인 교회등 여러 곳에서 재정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후 나는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계속적인 전화 연락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지금 다시 그의 교회를 더 작은 소그릅으로 나누어 인도하고 있다. 여러 신자들이 잃어버림을 당했지만, 남아 있는 신자들은 오히려 더 굳은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경험이며, 수십명씩의 집회가 어렵기 때문에 5~10명씩 10여개 그릅으로 나누어 신자들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이야기, 교회 건물의 철거뿐 아니라 1500여권의 성경과 또한 많은 양의 본 교회 서적들을 압수당한 사건, 지금까지 그 책들을 돌려받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나 아무 결실이 없음을 이야기하며 기도의 도움을 호소해왔다.

그는 힘있는 젊은이었고, 영적인 지도자였다. 핍박과는 거리가 먼 나라에서 재림교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목사의 일을 하고있는 나에게 공산 치하 소련에서의 부자유스러운 시절을 마치고 나라가 독립되어서도 다시 핍박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빠샤와 그 성도들의 이야기는 생생한 대쟁투의 현장 중계처럼 마음을 울렸다. 빠샤와의 만남은 나에게 새로운 의욕과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를 따르고, 하나님의 일을하는 이들이 있는 모든곳에 함께하신다는....

<2000년도에 교회지남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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