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랴는 이스라엘의 서편 지중해 해안의 도시입니다.
페니키아인에 의하여 B.C. 3세기에 건설된 작은 항구도시를
B.C. 63년에 폼페이우스가 점령한 후,
헤롯 대왕이 B.C. 22년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여 그 이름을 가이사랴라 지었습니다.
이후, 큰 인공 항구를 만들고
방파제와 로마식 원형극장, 로마식 목욕탕, 전차경기장, 아우구스투스 황제 신전등을 지었습니다.
발굴중인 유적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의 관저는 바로 이 가이사랴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라틴어로 기록되어있는 기념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돌비는 예수를 재판한 로마 총독 빌라도가 가이사랴에 주재했다는 증거인데요,
기념비 진품은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소장되어 있고,
발견된 자리인 가이사랴에 있는 것은 모조품입니다.^^
가이사랴는 이후 사도행전에도 여러 번 언급되는 중요한 도시입니다.
가이사랴에 주둔하던 로마 백부장 고넬료는 욥바의 피장 시몬 집에 머무르던 베드로를 데려오게 하여,
자신과 함께한 모든 사람이 침례를 받았습니다(행 10장).
베드로가 유대인이 아닌 로마제국 장교 고넬료와 그 동료, 친지들에게 침례를 준 사건은,
유대인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인종과 국가를 초월하여 범세계적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역사적인 일이었습니다.
십자군 시대에 가이사랴에 건설된 거대한 요새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1265년 이집트 왕 마믈묵은,
십자군의 요새였던 가이사랴를 점령하면서 완전히 파괴하고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그 후 600년이 지난 후 20세기에 이르러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시작했지요.
가이사랴의 성채는 십자군 시대(주후 1291~1517)에 규모가 가장 작았고,
헬라 시대(주전 332년~166년)에는 십자군 시대보다 3배 컸으며,
헤롯 시대(주전 37~4년)에는 십자군 시대보다 8배나 규모가 컸다고 합니다.
지중해가 한눈에 보이는 원형 극장에서는 지금도 공연이 열리고 있습니다.
로마인의 자리에 앉아서 2000년 전에 이 곳에서 어떤 공연이 열렸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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