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대나 맞아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몇 대를 맞는 것이 한계일까요?
우리 나라에도 근대적 형벌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곤장 100대”, “매우 쳐라” 등등, 태형이 일반적이었지요.
현대에 들어와서는 형벌로서의 매는 자취를 감추게 되지만, 옛날에는 어느 국가에든지 형벌로서의 ‘태장’이 존재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범죄한 자에게 태장이 가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신 25:2) 악인에게 태형이 합당하거든 재판장은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 죄의 경중대로 여수이 자기 앞에서 때리게 하라
“죄의 경중대로 여수히”라는 말에 '여수히'에 해당하는 '미스파르'는 '세다', '기록하다'는 말에서 온 단어로 곧 '일정하게', 또는 '적당한 수로'(KJV, by a certain number)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범죄자가 저지른 죄에 비해 너무 무거운 형벌이나 또는 그 반대로 지나치게 가벼운 형벌을 가하는 것과 같은 형평에 어긋난 처사를 하지 말라는 강조적 의미로 쓰인 단어입니다. 따라서 모든 죄악은 거기에 따른 적절한 징벌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 곧 율법의 공의로운 정신입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태형(笞形)의 집행시에는 재판정의 수석 재판관이 입회하여, 신명기 28:58-59 또는 29:9을 큰 소리로 봉독하였다고 합니다..
(신 28:58-59)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신 29: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태형 후 맨 마지막에는 "그러나 주께서도 자비가 충만하셔서 저들의 죄를 사하셨느니라"는 말로 끝맺음 하였다고 합니다(Mishna).
그런데, 이스라엘의 태형법에는 상한의 제한이 있었습니다.
(신 25:3)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
왜 태형에 40대라는 상한선을 두었을까요?
(신 25:3) ... 만일 그것을 넘겨 과다히 때리면 네가 네 형제로 천히 여김을 받게 할까 하노라
'40'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종종 '심판'과 '연단' 또는 '시험'을 의미하는 상징수로 사용됩니다(창 7:12 ; 출 24:18 ; 민 13:25 ; 마 4:2 ; 행 1:3). 그러므로 40대의 매를 때리는 것은 곧 죄에 대한 심판을 뜻함과 동시에 선한 길로 인도하려는 연단의 방편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형벌제도에 있어 그 근저에 흐르는 사상은 “회복”이었습니다. 마치 현대 형벌제도가 보복이 아닌 ‘교정’에 그 기초적 사상을 두고 있음과 같습니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에 있는 이 보복형은 어찌 된 것일까요?
(출 21: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 법은 소위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과 일맥상통하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입니다. 이 법은 사회적으로 개인의 보복을 최대한 억제하고 재판장의 판결에 따르게 함으로써(22절) 복수의 남용을 막고자 한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보복의 원칙은 레 24:19, 20 및 신 19:21에도 나타나는데, 그것들 역시 보복이 목적이 아니라, 이같은 엄격한 규정을 통해 보복의 악순환을 예방하는 데 역점이 주어진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형벌도 사실은 보복형이 아니라, 더 이상의 과도 보복을 방지하는 관례였습니다.[Petra 註釋] 사실 그 이전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 ‘한 눈에 양 눈, 한 이에 많은 이’로 보복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이 법의 정신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하신 형벌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5:3을 공동 번역으로 다시 읽어봅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40대 이상을 때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비록 죄인이지만 여러분의 동족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까지 손상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유대인들은 태형을 집행할 때 40에서 하나를 감한 39대까지만 때렸습니다. 그 이유는 혹시라도 계수(計數)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40대의 매를 초과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Pulpit Commentary). 후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던 중 다섯 번이나 맞았다는 매가 바로 그것이다.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여하튼 본 규정은 당시 이방 국가에서처럼 인간을 무자비하게 때림으로 해서 사람을 불구로 만든다든지 혹은 죽게 되도록 만드는 경우를 미연에 방지 시킨 규정입니다. 따라서 만일 40대 이상의 형벌이 가해질 정도로 중한 범죄이면, 재판관은 차라리 그를 처형시켜야 했습니다. 본 절은 범죄에 대해 마땅히 징벌함으로써 정의 구현과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고 할지라도, 타인의 인격을 송두리째 짓밟는 행위는 허용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규례임에는 분명합니다. 비록 범죄자라 할지라도 그 기본 인권만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인 것이지요(Matthew Hanry).
우리 하나님께서는 형벌의 시행에 있어서도 자비의 모습을 보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시 116: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자비는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이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곤장 100대에 익숙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겠다. 그 오랜 옛날부터 저런 자비스러운 율법아래에 살았으니...”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다시 말합니다.
(딛 3:3-5)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3), 이 말씀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맞아도 싼 사람인데...”라는 뜻입니다. 곤장 100대가 넘는 죄인이란 말이지요.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험만 허락하시고, 제한하신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5) 이 마지막 부분은 이제는 죄 없는 사람으로 새롭게 살아갈 기회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선언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E. G. White는 그의 1895년 12월에 쓴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그 흐름이 완고한 사람들의 마음에 부딛혀 방해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넘쳐들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보이시는 최고의 자비와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수년간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의 결혼 관계를 깨뜨리지 않고, 가정을 잘 지켜온 한 부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둘 다 한꺼번에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낙담했을 때, 나는 낙천적이 되고, 내가 곤란을 당할 때에는 아내가 끈기를 보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모두 한꺼번에 낙담하였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두렵습니다.”
어떠한 관계도 양쪽이 동시에 신뢰심을 잃으면 재빨리 괴로운 것이 되고 맙니다. 예레미야는 그의 백성들이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떠나 방황하였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성실하고, 침착하지 못하였으며, 심지어는 반역적이었지요. 만일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가, 전적으로 백성들의 신뢰심에 근거된 것이었다면, 그것은 확실히 끊어졌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성실하심에 대하여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그 끈을 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끈을 놓지 않으시고, 결과적으로 둘 다 한꺼번에 낙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한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성실하심과 자비를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명하십니다.
(눅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자비를 나타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레이스에만 매달려 있는 이들에게 자비심을 보입시다. 신앙을 한다고 하지만, 확고하게 붙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이들을 향해 자비함을 보입시. 아직 신앙의 원숙함에 들어서지 못한 이들을 향하여 자비함을 보입시다.
(시 18: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오늘도 우리에게 자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