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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줄 2

2005.10.26 10:47

정근태 조회 수:467 추천:7



10월 24일 오후.
1000명 선교사로 이곳 카자흐스탄에 파송되어 함께 지내게 될 박지범 군이 도착하는 날입니다.
라직 집사님과 함께 마중하기 위해 알마티로 길을 나섰습니다.
캅차가이를 막 벗어나려는데 길가에서 한 할머니가 태워달라며 손을 들었습니다.
목적지가 같은 방향임을 확인하고(러시아어로), 동승을 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할머니가 물었습니다.(한국말로)
“지비가 목산님이요?” 아마도 우리가 하는 얘기를 들으신 모양입니다.
저희는 카작 할머닌줄 알았습니다. 사실 우리 민족과 카자흐 민족은 외모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비슷하거든요.
“할머니 고려 사람이예요?” “그러잖코!”
알마타로 가는 한 시간 동안, 길고 긴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김 올랴 할머니는 원동(러시아 극동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프스크 등)에서 1935년 태어났다고 합니다.
두 살 때인 1935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서 중앙아시아로 오는 화물 열차에 온 가족과 함께 실려졌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 아이들이 도착하지도 못하고 죽어갔지만, 다행히 할머니 가족은 중앙아시아에까지 살아서 도착하여, 황량하고 나타가 다니는 사막 지역인 지금의 카자흐스탄 우스토베(알마티에서 가까운 소도시)에 내려졌(버려졌)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성년이 된 올랴는 스무살 무렵 카프카스(지금의 코카서스 지방, 그루지아, 우크라이나 지방)의 고려인 청년에게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양파와 양배추, 감자 등 온갖 작물들을 가꾸어 파는 농군의 아내로서의 생활을 했답니다. 작물을 가꾸고, 작은 트럭을 빌어서 인근 도시로 나가서 팔고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당시를 추억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당시 온 세상을 다 그것들 팔러 다녔소” 남편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 작물들을 싣고 팔러간다는 핑계로, 온 소련 땅을 다 돌아다녔다는 겝니다. 상 페쩨르부르크(레닌그라드)부터 시베리아 쪽까지, 까프카스와 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돌아다녔답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자식들도 다 출가를 시키고, 이마에는 주름이 늘고,,, 함께 살아온 남편도 세상을 떠나고,,,
할머니가 되어서 이제 다시 제 2의 고향인 카자흐스탄 우스토베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우스토베에는 이미 아는 이들이나 가족도 없고,,
마침 동생이 이곳 캅차가이에 사는데, 동생이 같이 소일이나 하자고 캅차가이로 이사를 오라고 해서 2년 전부터 캅차가이에서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 두사람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1월에 놀러오오, 그때 후로는 내 집에 있응게, 우리 집에는 나빠께 없소마, 안까이(안사람)랑 가치 꼭 놀러오오”
고국에서 온 사람, 한국말을 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은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고향을 바라는 마음이 고개를 든 것 같습니다.
당신 집 전화번호와 주소를 다 적어 주시고는, 우리 집 전화번호까지 물어서 적고, 허리춤의 지갑 안에다 넣으셨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이렇게 불쑥 말씀을 하십니다.
“내는 왜 교회 안다니는지 아오?”
무슨 답이 나올까 긴장하면서 되물었습니다. “왜요?”
쿡쿡거리며 웃으시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술을 못끊었거든~” “교회갔다가, 또 술먹고, 또 죄지면 않되지~~ 그래서 교회에 안가오”
얼른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할머니 괞찬아요, 먼저 교회에 오시고, 열심히 다니시다가,, 차차 끊어도 되요.. 후딱 끊으심 더 좋지만”
할머닌 그래도 술 먹는 이가 교회에 가면 안된다고 생각하시는 눈칩니다.
제가 다시 약속했습니다.
“할머니, 제가 꼭 할머니 댁에 놀러 갈께요...”
고향인 한국 말과 소식 뿐 아니라, 더 큰 본래의 고향인 하늘 이야기를 들고 찾아갈 것을 마음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다음 어떻게 될지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다음 이야기는 방문하고 난 후에 올리겠습니다.



카자흐스탄 캅차가이 선교지에서 정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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