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광장

2019.06.17 13:38

정근태 조회 수:2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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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광장(이탈리아어: Piazza San Pietro)은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바로 앞에 조성되어 있는 광장입니다.
이 광장은 로마 시의 보르고 리오네 구역과 동쪽으로 접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명령으로 지어진 성 베드로 광장의 설계자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인데,
베르니니는 가톨릭교회가 그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포용한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머리로 두고,
반원형의 회랑 두 개를 팔로 묘사함으로써,
성 베드로 성당이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베르니니는 이를 ‘어머니 같은 팔’이라고 말했습니다.
넒이는 최대 3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베드로 성당 앞에는 광장을 향하여 두 동상이 서 있는데,
하나는 베드로, 또 하나는 바울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동상이 그 중 베드로의 동상입니다.





광장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지 의자가 가득 놓여 있습니다.
회랑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165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67년에 완공된 이 회랑에는,
16m 높이의 대리석 기둥 위에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조각한 140개의 성인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조각상들은 각각 높이 3.24m의 큰 석상이지만,
회랑 건물 자체가 워낙 거대한 규모라서 그런지 조그맣게 보입니다.





성 베드로 광장 양편에 각각 네 줄로 늘어선 토스카나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로 이루어진 베르니니의 회랑은,
광장 한 가운데 있는 오벨리스크와 함께 베드로 광장의 압권입니다.





베르니니는 열주회랑을 통해 웅장함을 살려냈습니다.
그는 고전적 건축표현 양식에서 가장 단순한 정렬인 도리스식의 토스카나 주식(柱式)을 사용하였습니다.
회랑은 4줄의 대리석 기둥이 3개의 통로를 만들고 있습니다.
회랑 내부의 3개의 통로는.
양쪽은 인도로, 가운데는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차도로 보입니다.
회랑에는 지붕을 있고,
입구는 삼각형 모양으로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과 비슷합니다.





광장에서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화려한 두개의 분수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분수대는 대성당을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곳으로,
로마시대 도시의 광장에 있었던 분수나 수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앞의 광장은,
크리스마스를 비롯한 로마 카톨릭의 중요한 행사에 교황이 군중에게 모습을 보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조금 더 뒤로 물러서니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운데 있는 성 베드로 성당,
양쪽으로 뻗은 회랑,
그 가운데 광장,
그리고 가운데 서있는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사도궁(이탈리아어: Palazzo Apostolico)인데,
성 베드로 성당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들의 집합체로 교황이 거주하고, 집무하는 곳입니다.





이 사도궁은 5세기 무렵에 세워졌는데,
처음에는 로마를 방문하는 외국의 사절을 접대할 때에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아비뇽 유수기(1309년-1377년)에 교황의 거처를 라테란 궁으로 옮겼다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다시 로마로 돌아오면서 사도궁이 교황의 정식 주거지가 되었습니다.
이 사도궁 건물들은 여러 번 증, 개축되었는데,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 조각, 회화의 거장들이 거의 모두 참가하였습니다.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 가로, 마델로, 베르니니 등의 거장들이,
이 바티칸의 궁전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으로 만들었습니다.
견고한 이 궁전에는 장중하고 웅장한 천사백 개가 넘는 방과,
천 개에 달하는 계단,
스무 개의 안뜰,
수천 채의 건물이 늘어서 있는데,
이 속에는 여러 박물관, 도서관, 화랑, 전시실 등이 있습니다.
특히 전면에 보이는 건물의 제일 윗층은 교황의 사저로,
교황 사저는 현관, 서재, 교황 비서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순례객들을 향해 축복하는 직무실,
침실, 대리석 목욕탕, 영화 상영실, 의료실, 개인 경당, 작은 거실, 식당과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586년에 오벨리스크가 현 위치로 세워졌습니다.
광장 중앙에 세워진 붉은 회강암의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3세기에 세워진 것입니다.
기원후 37년 칼리굴라 황제가 네로 경기장의 중앙 스피나로 옮겨 세운 것입니다.
그러다가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의 지시로 기술자 겸 건축가인 도메니코 폰타나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 오벨리스크를 옮기는 작업에는 수백 필의 말과 수천 명의 근로자가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무게가 320톤이나 되는 이 거대한 돌덩이를 세우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겠지요?
물론 이것을 이집트에 가서 빼앗아온 로마인들도 대단하기는 합니다.
이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과정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작업이었기에,
이를 세우는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어떤 소리도 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이 떨어졌습니다.
한 마디라도 소리를 낼 경우엔 바로 큰 벌을 내리겠다는 엄명이 있었지요.
그러나 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밧줄과 밧줄이 마찰을 일으키면서 불이 붙었습니다.
그대로 작업을 계속하면 밧줄도 끊어지고 오벨리스크도 넘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소리를 내면 그 자리에서 벌을 내리겠다는 엄명 때문이었지요.
그 때, 한 사람이 “밧줄에 물을 부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선원이었던 그 남자는 용감하게 문제의 해결 방법을 외진 것이지요.
즉시 밧줄에 물이 부어졌고,
이후에는 아무 사고 없이 그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목숨을 걸고 고함을 질렀던 그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용감한 선원은 처벌을 받는 대신에,
교황으로부터 성지주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에 종려나뭇잎을 공급할 수 있는 권한을 상으로 받았고,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중세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벨리스크 꼭대기에 있는 금으로 된 공 안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골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는데요,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먼지만 있었고,
이 고대의 공은 현재는 박물관에 잘 모셔져 있습니다.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와 군림을 나타내는 의미라고 합니다.





광장에서 베드로 성당 쪽으로 가는 길에는,
경비병이 눈을 부릅뜨고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이 경비병들은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 소속입니다.
이 근위대는 바티칸의 치안을 포함해서 교황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바티칸 시국이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군사조직입니다.
스위스 근위대의 기원은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는 스위스 연방과 동맹을 체결했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는 프랑스 국왕과의 동맹 기간 중에 스위스인 용병들을 고용하였습니다.
알렉산데르 6세의 치세 동안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당시 스위스인 용병들은 일선부대로서 최전선에 나가 싸웠습니다.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즉위하면서 200명의 스위스 용병들을 로마에 보내줄 것을 스위스 연방에 요청하였고,
1505년 9월, 카스퍼 폰 시레넨이 이끄는 150명의 병사들 가운데 첫 번째 파견대가 로마를 향해 떠났으며,
1506년 1월 22일에 로마에 입성하였습니다.
율리오 2세는 이들 스위스 근위대에게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스위스 근위대의 첫 번째이자 가장 치열했던 교전은 1527년 5월 6일에 있었는데요,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가 이끈 군대에 의해 로마 약탈이 벌어졌던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40명의 근위병의 경호를 받으며 비밀 통로를 통해 바티칸을 빠져나가 안전하게 피신하는 동안,
189명의 근위병 가운데 근위대장을 비롯한 147명이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스위스 근위대의 근위병이 되기 위해서는 전과가 전혀 없는 스위스 국적을 가진 미혼 남성으로, 가톨릭 신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스위스 군대에서 기본적인 군사 훈련을 마쳐야 하고,
또한 전문교육이나 고등교육을 이수해야 하며,
19세에서 30세 사이의 연령에 신장이 최소한 174cm 이상이어야 합니다.
이들이 입은 다소 촌스러운 제복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복의 최초의 색상인 푸른색과 노란색은 교황 율리오 2세의 집안(델라 로베레 가문)을 나타내는 색상을 도입한 것이며,
붉은색은 교황 레오 10세의 집안(메디치 가문)을 나타내는 색상을 도입한 것이랍니다.
세간에서는 흔히 스위스 근위병들이 현재 입는 제복을 디자인한 사람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회랑의 양쪽 끝을 따라 세워져 있는 철제 울타리는,
국경선입니다.
왼쪽은 성 베드로 광장, 즉 바티칸이고,
오른쪽은 이탈리아 로마입니다.
이탈리아 쪽은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거리와 연결됩니다.





국경 밖 이탈리아로 와서 광장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성당과 광장, 회랑과 오벨리스크,
그리고 사도궁까지 세트로 볼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에서 정면으로 뻗어있는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입니다.
“화해의 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는,
대로를 따라 산탄젤로 다리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는 1929년 바티칸과 무솔리니 사이에 체결된 바티칸의 지위를 인정한 라테란 조약을 기념하고자,
1937년에 착공하여 1950년 대희년을 맞아 개통되었습니다.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양편에는 아름다운 건물들이 나지막하게 줄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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