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사의 사자상

2016.02.21 08:49

정근태 조회 수:5339







스위스의 루체른에는 자연석을 쪼아서 조각한 사자상이 있습니다.
작은 공원 안에 있는 이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 혁명당시 튈르리 공원에서 사망한 스위스 용병들을 기리는 기념비입니다.

프랑스혁명 당시인 1792년 8월 10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물고 있던 궁전을 지키다가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용병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조각되었습니다.
덴마크 조각가 토르발센의 작품으로 1821년 독일 출신인 카스아호른에 의해 완성된 이 조각상은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는 사자가 빈사상태에서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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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발 아래에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흰 백합의 방패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이 사자기념비를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묘사했습니다.
스위스는 지금과 달리 매우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산업도 자원도 없는 스위스의 주 수입원은 젊은이들이 다른 나라에 용병으로 가서 외화를 벌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스위스 용병은 용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스위스 용병들은 자신을 고용한 이를 위해서라면 자기가 불리해도 죽을 때까지 싸웠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에는 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 주변의 정세는 매우 불안했지요.
1792년 4월, 프랑스 혁명이 자국으로 전파될 것을 우려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프랑스를 침공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 사이에서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프랑스를 점령하면,
지금까지의 혁명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돌았고,
유폐되어 있던 국왕 루이 16세와 오스트리아의 공주 출신인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를 복위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적에게 정보를 흘리고 있다는 소문이 맴돌아 민심은 흉흉해지고 있었습니다.
왕비의 친정이 다름아닌 오스트리아라서 파리 시민들이 그렇게 의심하는건 당연했지요.
1792년 8월 9일, 파리의 과격 혁명가들은 파리 시청을 장악하고 코뮌(Commune)을 결성하고,
파리 시민들에게 전면 봉기를 촉구하였습니다.
다음날 10일 수 만명의 파리 시민들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트가 거주하는 튈르리 궁을 공격하게 됩니다.
사실 1년전인 1791년 국왕 일가의 탈출사건 탓에,
국왕과 시민들 사이의 불신의 골은 매우 깊은 상태였습니다.





이 때 튈르리 궁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바로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이었습니다.
시민군은, “외국인인 그대들은 이 싸움과 관계 없으니 물러나라!”고 있고,
루이 16세가 "그대들은 이미 임무를 다했으니 이제 가도 좋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의는 목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고,
결국 그들은 끝까지 남아 튈르리 궁을 지켰고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 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이 싸움에서 도망가면 스위스 용병에 대한 유럽의 여러 고용주들의 인식이 나빠질 것을 알았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신들의 후손들은 용병일을 할수 없게 될 것이었죠.
그들은 변변한 산업도 없는 조국의 후손들을 위해 생명을 던졌던 것입니다.

바티칸에서 교황이 아직도 스위스 용병만을 고집하는 이유도 이러한 전통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천연 암벽을 깎아서 그 가운데 조각된 이 사자상은 웅장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사자의 얼굴이 정말로 슬프게 다가옵니다.
조국을 사랑했던 젊은이들의 모습이지요.





용맹을 강요받았던 그들,
그들은 결국 그들의 목숨으로 그들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국의 왕을 향항 충성이 아닌,
자신들의 조국과 가족,
그리고 후손들에 대한 사랑이지요.
우리 나라의 위정자들이 이렇게 후세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나라의 지금 모습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연못을 격하고 인증샷~
다른 관광지와는 다르게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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