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선생의 묘역

2007.12.28 21:57

정근태 조회 수:5807 추천:57

토요일 오후에 올라간 망우산,
공동묘지의 음울함이 아니라,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의 활기가 있는 묘한 분위기입니다.

한바퀴 도는 중에 조봉암 선생의 묘를 발견했습니다.



입구에는 선생의 말이 돌비에 세겨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독립 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해야 할 일을 하는 지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조봉암 [曺奉岩, 1898~1959]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입니다.
강화도 출신이고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 동안 복역하기도 했지요.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참여하여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였습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고요,
그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습니다.
그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여 문화부책(文化部責)으로 활약하다가,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습니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나 8 ·15광복으로 출감,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民戰議長)에 취임하였습니다.
1946년 박헌영(朴憲永)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진영으로 급선회하기도 했지요.
이후, 1948년 제헌의원·초대 농림부장관이 되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다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되었습니다.

그 해 진보당(進步黨)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이승만 정권의 억지였지요.
2007년 9월,
진실 화해 위원회는,
이 판결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고,
국가의 화해 조치를 권고하였습니다.

선생은 1959년 7월 31일,
사형 집행 직전에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하였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 밖에는 죄가 없소.
그런데 나는 이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요.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자신의 신념을 위해 평생을 달린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 정근태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0-2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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