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 1

2018.04.10 21:27

정근태 조회 수:2767

2018060.JPG

카자흐스탄의 경제 수도 알마티에서 서쪽으로 차로 약 11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면 투르키스탄에 도착합니다.
투르키스탄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마치 미나레트같은 구조물에,
러시아어로 크게 쓴 투르키스탄이라는 글이 이 곳부터 투르크메니스탄임을 알려줍니다.
오늘날의 투르케스탄 시(市)(City of Turkestan, 옛 ‘야시(Yasi)’)는 옛 카자흐 도시들로부터 유래합니다.
16세기까지 ‘야시’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 도시는 농경문화와 유목 문화의 교차점이었던 시르 다리아 유역 ‘샤브가르’의 교외에 있었습니다.
샤브가르는 거대한 수공예·교역 중심지로 발달하였으나,
12세기부터 야시가 그보다 더 중요한 도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야시는 13세기의 몽골족의 파괴 행위로 피해를 입지 않은 몇 안 되는 장소들 중 하나였습니다.





반대편에는 사막의 비단길을 지나는 낙타를 탄 대상들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투르키스탄 시는 과거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대 동서양을 이어준 무역로인 ‘실크로드’의 일부이지요.
또한 아흐메드 야사위의 무덤으로 향했던 순례 행렬은 야시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시내의 독특한 디자인의 레스토랑 건물입니다.
마치 유목민이 텐트를 친 듯한 모습입니다.
건물 구조도 사막 지역에 어울리게 바람이 잘 통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제 멀리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靈廟, Mausoleum of Khoja Ahmed Yasawi)”가 보입니다.
사실 이곳 투르키스탄을 찾은 이유는 바로 이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를 보기 위함입니다.
투르키스탄에는 알려진 볼거리가 이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 외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묘(靈廟, 마우솔리움(Mausoleum)는 죽은 위인이나 신격화된 인물의 영혼을 모시는 묘지입니다.
그냥 묘지와는 다르게 신성한 구역으로 여겨지는 장소지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성벽 너머에 영묘가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서 있습니다.
1370년대에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아미르 티무르는 메소포타미아, 이란, 트란스옥시아나를 점령하고 통치했습니다.
티무르는 북쪽 국경 도시들에 기념비적인 공공 건축물과 모스크, 영묘, 마드라사 등의 종교적 건축물을 정책적으로 건설하였는데,
아흐메드 야사위의 영묘도 그러한 건축물 중 하나였습니다.
티무르가 영묘를 건축한 것은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나, 거기에는 더욱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들이 있었습니다.
수피즘을 이용하여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음을 알았던 티무르는,
거대한 영묘의 건설을 통해 자칫 자신의 통치에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었던 수피들과 거대한 유목민 공동체로부터 호응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영묘의 설계에는 티무르 자신도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영묘의 주인공인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입니다.
아흐메드 야사위(1103~1166)는 이슬람교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즘의 지역 종파 창시자입니다.
수피즘(Sufism, 아라비아어 양모를 뜻하는 타사우프(tasawwuf))이란 이슬람교의 신비주의 분파인데요,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발생한 영적 운동인 수피즘은 이슬람교의 내면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며 심리적·영적인 측면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 경전을 중시하는 전통적 이슬람교에서는 이를 이단시하고 있는데요,
수피즘은 특히 12세기~13세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수피즘은 여러 개의 지역 종파로 분화되었는데, 그중 튀르크 파(Turkic)의 지도자가 바로 이 영묘의 주인공인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입니다.
야사위는 1103년에 이스피잡(Ispidjab)에서 태어났고,
당시 이슬람교 중심지의 하나였던 부하라(Bukhara)로 가서 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야시(오늘날의 투르키스탄)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1166년에 그곳에서 사망합니다.
그는 수피즘을 대중화하고 이슬람교를 전파함으로써 중앙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티무르 황제의 명령에 의하여 조성된 이런 엄청난 규묘의 영묘는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이제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영묘와 그 오른 쪽에 서 있는 “라비아 술탄 베김 영묘”는 멋진 조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의 영묘는 티무르(Timur) 황제의 시대인 1389년~1405년에 건축되었습니다.
39m 높이로 당시 세워진 건축물 중 가장 큽니다.
영묘의 건설을 위해 티무르는 최초로 시라즈(Shiraz)와 이스파한(Isfahan)으로부터 이주해 온 건축의 대가들로 구성된 팀을 활용하였는데,
비록 일부 미완성으로 남았지만,7혁신적인 공간 배치 및 둥근 천장과 돔의 형태 등 영묘의 건축에 적용된 실험들은 이후의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Samarkand)의 건설에도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건물의 외양입니다.
특히 비비하눔 모스크(바로가기 : http://1stdream.com/world_tour/2469)나,
레기스탄 광장의 건물들(바로가기 : http://1stdream.com/world_tour/2589)과 매우 흡사합니다.
티무르는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동시에 원활한 통치를 위해 영묘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이 영묘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문화와 당시의 건축기술 발달을 보여줍니다.





현지의 신혼부부들은 이곳 영묘를 찾아 참배하고, 웨딩촬영을 하기도 합니다.





한편에 설치되어있는 유르트입니다.
유목민족의 전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주거형태지요.
떠나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유목민인지라,
이동식 주택인 유르트는 특별한 상징성을 가지는데,
사실 이렇게 큰 영묘는 영구적 건축물이라 유목민의 전통에서는 벗어난다고 할 수 있지요.





그 옆에는 공작새 한 마리가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돈을 받고 사진찍히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앞에 자리잡은 “라비아 술탄 베김 영묘”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벽돌을 쌓은 외부 구조물과 푸른 돔이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와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16세기~18세기에 카자흐 칸들의 수도이자 거주지였던 투르케스탄 시는 최대 규모의 수공예와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습니다.
그 도시에서 아흐메드 야사위의 영묘는 투르케스탄 시의 뛰어난 기념물이었고,
잇달아 유명한 인물들이 그 부근에 묻히게 됩니다.
“라비아 술탄 베김 영묘”도 그 중 하나이지요.





“라비아 술탄 베김 영묘”의 푸른 돔 위의 초생달은 이 영묘가 이슬람에게 매우 의미는 곳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의 부속 건물과 같은 느낌이지만,
실상은 후대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드디어 “코자 아흐메드 야사위 영묘”전면에 섰습니다.
영묘를 정면에서 바라보면 전체적으로 반듯한 직사각형에 가운데부분이 뾰족하게 솟아 오른 형태입니다.
티무르가 만든 건물들은 전부 다 거대한 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벽돌로 쌓아올린 영묘의 정면은 진흙으로 만든 그대로의 벽돌 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묘의 건설은 1389년~1399년에 시작되어 티무르가 사망한 1405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주건물의 파사드는 티무르가 사망했을 당시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였는데요,
벽에서는 아직도 원래의 지지용 비계가 그대로 툭 튀어나와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후의 왕조들은 티무르가 계획했던 영묘를 완성할 만한 재력도, 그에 대한 흥미도 없었고,
미완성으로 남은 영묘의 입구 및 일부 실내 건축은 당시의 건축 방식에 대하여 잘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후 16세기에는 영묘의 정문이 수리 및 재건축되었습니다.
부하라의 통치자였던 압둘라 칸이 문의 아치를 수리하도록 하였지요.
그로부터 19세기까지 투르케스탄은 카자흐 칸들의 거주지가 되었습니다.

계속됩니다.

1stDream.com 로그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