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델비아의 성 요한 교회

2017.05.21 10:55

정근태 조회 수:4021




일곱 교회 투어를 하게 되면 빌라델비아 교회로 소개받는 성 요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A. D. 600 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빌라델비아에 있던 교회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3:7-13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별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정면에서는 교회를 지탱했던 큰 기둥 두 개가 보입니다만,
자세히 보시면 왼쪽 기둥의 뒷부분에 기둥 한 개가 더 보입니다.
한 건물의 기둥 세 개가 남아 있는 것이지요.
빌라델비아[필라델피아, Philadelphia]라는 도시명은 ‘형제애’(兄弟愛)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 당시의 빌라델비아는 소아시아 서부, 사데 동쪽 42㎞ 지점에 위치한 리디아 주(州)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버가모의 왕 필라델푸스 앗탈루스 2세(Philadelphus Attalus Ⅱ, B.C. 159-138?)에 의해 B.C. 150년 경 건립된 도시이고,
그의 이름 필라델푸스를 기념하여 필라델피아라는 지명이 만들어졌습니다.
후일 A. D. 130년 로마에 귀속되었습니다
이 도시는 그 이름의 의미인 형제애에 관계된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앗탈로스 2세는 페르가몬(Pergamon) 왕국 앗탈로스 왕조의 4대 왕인 유메네스 2세의 동생이었습니다.
유메네스 2세는 전쟁에 나갈 때마다 정치와 군사에 대한 지식이 많은 동생 필라델푸스,
즉 앗탈로스 2세에게 내정을 맡기곤 했지요.
로마는 인기가 많은 필라델푸스를 빌라델비아의 통치자로 세워 놓고 자기들 뜻대로 이용하려고 필라델푸스를 충동하였으나,
그는 여기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형 유메네스 2세에게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유메네스 역시 죽을 때 자식이 아니라 동생인 필라델푸스(앗탈로스 2세)에게 왕위를 계승해 주게 됩니다.
앗탈로스 2세는 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고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도시를 건설하는데,
도시 이름은 자기의 원래 이름을 따 빌라델비아(Philadelphia)라고 하게 됩니다.





정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면 오른쪽 기둥이 보입니다.
별 다른 유적이 없이,
남아있는 기둥만이 웅장한 교회와 융성했을 옛 시간의 추억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남아있는 기둥들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계 3:12)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신기하게도 전성기 때 큰 규모였으리라 짐작되는 ‘성 요한 교회’는 지진으로 거의 다 무너지고,
아래는 돌로, 윗부분은 벽돌로 된 3개의 육중한 기둥만 앙상하게 남아 있답니다.
어쩌면 그렇게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기별처럼 기둥들이 남아 있는지...
교통의 요지였고, 전략적 요충지였던 빌라델비아는 무역과 상업이 발달하였고,
에게해를 건너오는 그리스 문명을 소아시아와 그 너머의 동쪽으로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이 다 그렇듯이 지질학적 요인 때문에 수많은 지진으로 인해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A.D. 17년 대지진으로 빌라델비아는 잿더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윗 부분은 벽돌로,
기둥 아랫부분은 육면체의 석재로 건축한 특이한 건축 구조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석재들의 크기가 각양각색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석재의 색도 제각각입니다.
‘소 아테네’로 불릴 만큼 우상 숭배가 창궐했고,
티베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황제 숭배가 극심하여 많은 기독교 순교자들이 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빌라델비아 성도들을 이런 모든 환난을 잘 이겨낸 충성된 자들이라 칭찬하고 있습니다(계 3:7-13).
역사는 반복되어 훗날 오스만 투르크의 수 차례에 걸친 공격으로 1391년 함락될 때까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가운데서도 비잔틴 제국의 최후 보루로,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킨 것은 로마와 동방 교회의 역사의 한 획을 긋고 있습니다.





뒤쪽의 기둥입니다.
기둥 옆에는 석관들이 놓여있습니다.





이 석관들이 교회 주변에 있는 것은
중세시대 교회 가까이에 묘지를 두려고 했던 이들의 신앙의 상징입니다.





어쩌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3:8)고 칭찬한 계시록의 칭찬이 이들 석관의 주인을 향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빌라델비아 교회는 믿음의 시련 중에서도 복음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서머나 교회와 함께 주님께 칭찬을 받은 교회이지요.





묘비로 보이는 석판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요즘 묘비처럼 십자가와 글귀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기둥입니다.
웅장한 기둥이 더 웅장했을 교회의 본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교회터는 지진으로 인해서 가라앉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 요한 교회 경내에서 일행들과 인증 샷~
이곳의 현재 지명은 알라쉐히르(Alasehir)입니다.
해석하면 ‘알라 즉 신(神)의 도시’란 뜻이지요.
투르크인들이 빌라델비아를 점령한 후 이름을 알라쉐히르로 명명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투르크가 이 아나톨리아 지역을 점령하면서 주민들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강제적으로,
혹은 회유를 통해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빌라델비아만은 끝까지 개종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 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에 감명을 받은 투르크인들은 ‘이곳은 진정 신의 도시’라고 인정했고,
그들의 언어대로 알라쉐히르(Alasehir), 즉 ‘신의 도시’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지요.
빌라델비아는 투르크인들의 침략 속에서도 끝까지 남아 있던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지요.
잘 알려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필라델피아’라는 도시도, 바로 이 빌라델비아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교회의 기둥 뒤로 모스크의 미나레트가 서 있습니다.
일설에는 교회의 기둥 하나를 뽑아서 저들의 사원을 짓는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시간이 되면 미나레트 꼭대기에 확성기를 달아 놓고 하루 5번 큰소리로 기도 시간을 알려줍니다.
아잔이라고 하지요.
교회의 유적에서도 큰 소리의 아잔이 들립니다.


2017220.JPG

앵글을 이렇게 잡으면 세 개의 기둥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네 번째 기둥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안타깝습니다.
고대의 기둥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것은 “영구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기둥들은 무너졌지만,
사탄을 이김으로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된 성도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 경내에 있는 작은 기둥의 잔해들입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의 이 지역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 산업이었고,
농산물로는 포도를 주로 재배하였는데,
지금도 이 지역은 수십 킬로미터의 포도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당시의 소아시아 내 300여 교회에서 쓰는 성찬식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여,
형제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다고 합니다.





교회 주변 마을입니다.
요한의 시대에도 서 있었을 돌산과,
그 아래의 작은 마을,
한 때 복음의 등대로 세워졌던 빌라델비아의 교회는 퇴락하고,
이슬람의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는 마을,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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