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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치악 체육관 앞에는 의병장 민긍호 장군의 기념상이 있습니다.
민긍호(閔肯鎬, 미상∼1908. 2. 29) 장군은 명성황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로 서울 출생입니다.
1897년에 진위대 입대한 장군은 원주 진위대 산하의 고성분견대와 춘천분견대에서 근무하게 되지요.
대한제국 시절인 1900년 장군은 정교(오늘날 상사)로 진급하였고,
1901년에는 특무정교(특무상사)로 진급하여 원주진위대 본부에서 일하게 됩니다.
이런 사유로, 장군의 기념상과 묘역이 원주에 있게 되지요.





계단을 올라가서 원주 정미의병 100주년 기념비와 민장군 기념상 앞에 섰습니다.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될 때 원주진위대의 대대장 홍유형이 군부의 전보 명령에 의해 상경 길에 오르게 됩니다.
대대장의 상경을 해산 명령을 받으러 가는 것으로 판단한 그는,
대대장 홍유형의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할 것을 구상하고,
8월 3일 소대 병력을 급파하여 상경 길에 있던 그를 본대로 데려와 부대를 지휘하여 서울로 진군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겁먹은 홍유형이 그날 밤 여주로 도망하자,
그는 자신이 몸소 원주 진위대 병사들을 지휘하여 봉기하기로 하고,
거사일을 원주 장날인 8월 5일로 결정하였습니다.
장날에는 많은 농민들과 포수들이 장터에 모이기 때문에 다수의 동조자들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겠죠.
그는 비상나팔을 불게 하여 장병들을 소집한 뒤,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무장 봉기를 선언하였습니다.





전면에서 본 기념상입니다.
봉기에 동조한 대대장 대리인 김덕제, 정위와 함께 무기고를 열어,
병사들을 물론 봉기에 호응한 일반 민중들에게 총기와 탄약을 분배하여 의병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이들은 그의 지휘 아래 우선 우편취급소, 군아, 경찰분견소 등을 습격하여 원주읍을 완전히 장악한 뒤,
미처 도망하지 못한 일본인들을 처단하면서 군수물자를 조달하였습니다.
나아가 의병부대는 원주 남산으로 도망간 일본 경찰대를 추격하여 패주시키고,
이곳에서 원주읍을 점령하기 위해 급파된 일본군 충주 수비대 부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여 십여 명의 적군을 사살함으로써 그들을 격퇴하였습니다.
이 같은 원주진위대의 봉기 사실을 보고받은 일본군 사령부는 서울 주재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 대대장을 지휘관으로 하여,
보병 2개 중대와 기관총 4정, 공병 1개 소대로 편성된 진압 부대를 파견하였지만,
이들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원주 정미의병 100주년 기념비의 후면입니다.
이후 의병부대는 일본군에 대한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의병부대를 소부대 체제로 나누어 편성,
이를 여러 의병장들에게 맡겨 일본군과의 유격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민긍호의 총지휘 아래 여러 소부대의 의병들은 원주지역의 일본군들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특히 민긍호의 의병부대는 해산 군인들이 중심이 된 부대로 화력과 전투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활동지역이 과거 이들의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에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의병부대는 같은 시기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일대의 다른 의병부대와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일본군을 괴롭혔습니다.
그의 의병부대는 70여 차례의 일본군과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기념상이 세워지 곳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봉산 기슭에는 장군의 묘역이 있습니다.
민긍호 장군의 묘소 안내판입니다.
당시 강원도 관찰사가 의병들이 투항할 것을 권유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냅니다.
“국권을 빼앗기고 국민이 도탄에 빠져있는 때에 내가 일본에 투항하면 일본 치하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부귀가 8역적(逆賊)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나의 뜻은 나라를 찾는데 있으므로 강한 도적 왜(倭)와 싸워서 설혹 이기지 못하여 흙 속에 묻히지 못하고 영혼이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떠돌게 될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묘역은 최근에 단장되어 의병들의 부조가 세겨져 있습니다.
1908년 2월 27일, 그가 직접 지휘하는 의병부대는 원주의 강림 박달치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조우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격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경찰대는, 2월 28일,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대는 의병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을 포위 공격하여 왔습니다.
의병 부대는 완강하게 대항하였지만,
상호 교전이 길어지고 의병 부대는 탄환이 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일본군에게 체포된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의병들은 사생결단의 탈환작전을 전개하였고,
이에 다급해진 일본군은 그를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습니다.





그의 묘소 앞에 세워진 충혼탑입니다.
“고 민족 영웅 의병 대장 민 특무 긍호공 지 충혼탑”이라고 씌여 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초라한 시멘트 탑입니다.
비싼 대리석들이 얼마나 흔한 시절입니까?
물론 대리석 탑이 더 가치있고 초라한 비는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석도 아닌 시멘트탑이라니,,,





묘역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는데요,
하필이면 그 때의 대통령이 장군이 목숨을 다해 싸우던 일본군 출신의 그 .....
참 아이러니한 나라입니다.





묘비와 묘소의 모습입니다.
묘소의 기단석도 최근에야 설치되었지요.





묘소에서 내려다보면 그가 근무하던 원주 시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최근에 민긍호 장군의 이야기가 신문 기사에 실렸지요.
2015년 사대륙 피겨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장군의 외고손자 덕분이지요.
22세의 카자흐스탄 대표선수인 데니스 텐(22)이 바로 민긍호의 외고손자인데요,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이들의 후예들은 외국에서 떠돌고,
친일파의 후손들은 한국의 지도층을 형성해서 떵떵거리고 있지요.
데니스 텐은 2015년 2월 12일 서울 양천구 목동아이스링크에서 열린,
2015 국제빙상경기연맹(ISU) 4대륙피겨선수권대회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1위에 올랐습니다.
1위에 오른 데니스 텐은 "이번 대회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어찌 보면 나는 고국에서 국제대회를 치렀다."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텐’이란 성은, ‘정’이라는 발음을 잘 하지 못하는 러시아인들과 현지인들이 잘못 발음한 것이 그대로 굳어져 생긴 성입니다.
저도 중앙 아시아에 있을 때, ‘텐’이라는 성으로 활동을 했지요.





민긍호 장군의 초상입니다.
나라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이들을,
이 나라는 과연 생각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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