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국 사적지

2018.05.09 13:30

정근태 조회 수:2946




의성에는 조문국 고분군이 있습니다.
다소 생소한 ‘조문국(召文國)’은 삼한시대 의성 지역에 있던 진한 12국 중 하나입니다.
형성 시기는 다른 삼한시대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략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어 확실치는 않습니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고분군의 모습입니다.
앞쪽의 작약이 아직 피지는 않았지만,
그 너머의 고분들이 주변 산세와 잘 어우러지는 멋진 곳입니다.
정자에서 조문국 사적지를 내려다보면 고분들이 보이는데,
경주의 고분보다는 다소 아담한 크기의 고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벌휴왕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기록이 있고요,
지리지에는 조문국이 “신라 경덕왕 때 문소군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23년(940)에 의성부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의성현 고적편’에는 “조문국의 옛터는 의성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조문리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018121.JPG

잘 가꾸어진 잔디와 군데군데 솟은 봉분들이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경북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문국 사적지 내에는 40여기 고분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삼한 시대의 여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읍과 다수의 촌락으로 구성된 몇 개의 읍락이 국가를 이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입구에 세워진 기마궁수상입니다.





사적지 주차장 옆에는 문익점 선생의 '면작기념비'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손자 승로가 목화를 재배했다고 합니다.





오른쪽의 두 고분이 6호 고분입니다.
지름 20 m 의 비교적 큰 규모의 봉분 2기가 나란히 있습니다.
높이는 북쪽에서 2.5 m, 남쪽에서 4 m입니다.
분구 안에는 적석목관의 제 1묘곽과 장방형의 토광인 제 Ⅱ묘곽이 있습니다.
제 1묘곽의 출토유물에는 금제세환귀걸이. 은제과대장식. 은제교구 등 장신구와,
T자형 장병무기. 소화두대도. 철모. 철촉. 철착 등 무기류와 꺾쇠가 있고,
또한 여러 토기류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제 Ⅱ묘곽에서는 홍색 갈색의 유리구슬과 토기류가 출토되었습니다.





3호 고분입니다.
중간 크기의 고분으로 장신구를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습니다.
평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된 3호 고분은 밑지름이 14.3~10.7 m 내외, 높이가 3 m 정도였으며,
한 봉분 안에 돌무지덧널무덤(1곽), 덧널무덤(2곽), 유사돌무지덧널무덤(3곽) 등 3기가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1곽은 길이 5.8 m, 너비 3 m, 깊이 0.7 m,
2곽은 길이 5.3 m, 너비 2 m, 깊이 0.3 m 정도로 두 기는 규모가 비슷하고 11자형으로 나란히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1곽에서는 금귀걸이, 삼엽문대도, 은허리띠 등 장식품이 주로 출토되었고,
2곽에서는 많은 양의 토기와 철기류가 출토되었습니다.
그 뒤에 있는 커다란 돔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고분 중 하나의 내부를 볼 수 있는 고분전시관입니다.
고분전시관은 대리리 2호분이 있던 자리입니다.
이제는 그 대리리 2호분이 철제 구조물이 되었습니다만,
그 내부에 들어가면 고분의 모양과 순장의 흔적, 각종 유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고분들 중 고분 앞에 묘석이 있는 것이 경덕왕릉입니다.

물론 신라의 경덕왕이 아닌 조문국 경덕왕입니다.

조선 숙종 때 처음 발견된 무덤으로 조선시대 무덤처럼 상석을 비롯하여 석물들이 놓여 있습니다.
경덕왕릉이 발견된 배경과 관련한 전설이 조선 숙종 때 문인 미수 허목의 문집에 실려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이 능지는 약 500년 전에 오극겸의 외밭[瓜田]이었는데,
외를 지키던 어느 날 꿈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조문국의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 위에 있으니 속히 철거하라.”고 이르고는 그의 등에다 한 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답니다.
놀란 외밭 주인이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었습니다.
그는 현령에게 알리고 지방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고 매년 춘계 향사를 올렸고,
이후 제례행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구의 둘레가 74 m, 높이가 8 m이며,
능의 전면에는 가로 42 cm, 세로 22 cm, 높이 1.6 m의 비석이 있습니다.





조문국은 경북 북부권에서 종주적 위상을 가진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에 병합되면서 ‘잊혀진 왕국’이 됐지요.
의성에는 수많은 고분이 있습니다.
모두 900여기에 달하는 삼한 및 신라 시대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것들이지요.
이 고분군은 과거 강성했던 정치세력이 이 일대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요.





조문국은 185년에 신라에 병합되기까지 300년이 훨씬 넘게(369년) 이어졌던,
경북지역 최대 부족국가였다고 합니다.
이 고분군들은 그 영광의 한 조각들인 셈이지요.





3기의 고분을 발굴한 결과,
금동관을 비롯한 위세품 및 마구류, 의성 양식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이 출토된 물품들과 정보는 무료로 관람이 가능한 고분전시관과 조문국 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조문국이 위치했던 금성면 일대는 신라가 영남 일원에서 북쪽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교통로였습니다.
즉 소백산맥 안팎을 연결하는 계립령과 죽령의 두 교통로가 하나로 합쳐 경주로 들어가는 최단 거리였지요.
군사적으로 절대 요충지였던 것이지요.
이곳을 장악하여 소백산맥 방향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조문군은 757년(경덕왕 16)에 진보(眞寶,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비옥(比屋,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안현(安賢,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단밀(單密,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의 4개 현을 속현으로 가진 문소군(聞韶郡)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는 해처럼 시간이 지나면 나라도, 그 나라가 누렸던 영화도,
역사의 뒷길로 사라집니다.





산책하기 좋고 오랜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의성조문국사적지는,
의성을 방문하게 된다면 꼭 보셔야할 곳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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