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문화인이건 야만인이건, 지혜로운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입니다.”(롬 1:14, 현대인의 성경)
사도 바울이 지고 있는 빚은 어떤 빚입니까? 우리는 그가 지고 있는 빚이 “사랑의 빚”이라고 단언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책에서 그는 “서로 사랑의 빚을 지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롬 13:8, 현대인의 성경)라고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진 사랑의 빚은, 더할 수 없이 교회를 핍박하던 그에게까지 복음의 빛을 내려주신 하나님께 진 사랑의 빚이었고, 그는 다른 이들에게 빛을 전함으로 이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교회가 세워진 그 세기에 당시 로마 제국의 전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제일 공로자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처럼 열심히 빚을 갚으러 돌아다닌 사람이 아직도 “빚진 자”라면, 나는 어떻습니까? 더 나아가 한국 재림 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 재림 교회는 1904년, 일본의 구니야 히데 전도사로부터 세천사의 기별을 전해 들음으로 빚을 졌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 재림 교회는 그 일본에 목회자들을 파송함으로 빚을 갚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빚은 그 빛을 전해 준 나라에게만 갚아야 하는 빚이 아니라, 다른 이들, 아직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갚아야 하는 빚인 것입니다. 한국 선교 100주년을 넘어선 오늘 우리 한국 재림 교회는 빚을 갚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1세기 전에 한국에 뿌려진 빛의 빚을 갚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더 많은 재림 교인들이 있도록 재림 기별을 높이 쳐드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고, 지금 복음이 얼어있는 땅 북한을 향하여 최선의 준비를 하고 때가 되면 물밀듣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여러 나라에 우리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봉사하게 하는 것도 다른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또 한 방법을 제안한다면 한국 재림 교회에 의해서 처음으로 세 천사의 기별의 빛을 받아든 나라나 민족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재림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나라가 200개 국이 넘었다고 합니다. 재림교인이 전혀 없는 나라는 이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의 끝일까요? 그러나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 재림교회가 있다고 하는 200개국 중에서, 한 나라 전체에 재림교인의 숫자가 100명 이하인 나라가 얼마나 될까요? 정말로 복음이 들어갔다고 말하기기 부끄러운 나라가 얼마나 될까요? 정말 많습니다.
7,000만 인구에 재림 교인이 15명에 불과한 터어키, 600만 인구에 재림교인 90명인 투르크메니스탄, 그리고 대부분 비슷한 형편인 회교 국가들과 구 공산권 국가들을 비롯해서, 가장 최근에 독립한 동티모르(1개 교회 20여명의 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나라들의 경우에 재림교회의 자취를 찾고, 재림 기별이 외쳐지는 소리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제자들(Adventist)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나라가 아니라 “민족”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절망하게 됩니다. 아무리 교황권의 움직임과 미국의 일요일 휴업령에 관심을 기울여도 재림은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대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복음의 빛이 들어가지 않은 수많은 “민족”들, 더구나 재림 기별을 받지 못한 민족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한국인은 국제 사회에서 폐쇄적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오랜 단일 민족의 전통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귀착이라고도 합니다. “나”, “우리”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는 대신에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배타적 경향이 강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에 많이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그로벌화를 지향하면서 이러한 틀을 깨뜨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더구나 한국 기독교회의 선교사 파송은 지나치다 할 만큼 적극적이고 전에 볼 수 없었다고 할 만큼 많은 이들을 타문화 속으로 내어 보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작은 이슬람 마을 캅차가이에도 저보다 앞서 복음을 들고 와서 교회를 세우고 봉사하다 돌아간 한국 개신교 목회자의 발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재림 교회는 어떨까요? 우리는 눈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최근 들어, 많은 분들이 지회의 PMM 선교사 파송의 대열에 서신 것을, 1000명 선교사로 많은 청년들이 자원하여 나서는 것을, 저는 경이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드디어 한국 재림 교회가 한민족 선교와, 해외 한인 동포 교회에서 눈을 들어 다른 인종들과 민족들을 향해 빚을 갚아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인재들이, 하나님의 일꾼의 자격을 갖춘 이들이 일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정말로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라”는 말은 구호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 주님의 지상 명령이고, 우리가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의무입니다. 내 구역, 네 구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곳에서 할 수 없다면 저 곳에서, 저 곳에서도 할 수 없다면 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복음의 횃불은 빛을 발해야 하고, 그럼으로 우리는 빚을 갚아가야 합니다.
“인종을 구분하고 차별하여 나누는 것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하늘에 의해 승인될 수 없다. ... 그분께서는 열심히 선교할 수 있도록 드넓고 무한한 땅을 준비하시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사역을 땅 끝까지 확장하도록 명하신다. ... 그리스도 교회의 신자들은 추수해야하는 커다란 일터에서 믿음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성실히 일해야 하고, 열심히 고도하면서 일을 진행해야 하며 .... 빛을 발해야 한다.”(E. G. White, R & H, 1894년 10월 30일)
청년들과 젊은 목회자들이 이러한 꿈을 가지고 일어서지 않는 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일을 마치실 수 있을까요?
누가 “새벽 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을 주께 나아오게 할 수 있습니까?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을 언급한 시편 110편 3절 전체를 봅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주의 권능의 날”이 다다랐습니다. 이제 주님의 사역을 마칠 늦은 비 성령의 권능의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주님의 권능이 아니면, 이 많은 미전도 민족들에게 도저히 빛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여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냥 잠잠히 앉아서 시대와 징조들을 살피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미국의 동정을 살피고 교황권의 상황이 어떤가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해야하는 때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이러한 모본을 보이고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려 헌신 할 때, “새벽 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님의 복음의 빛을 들고 주님의 백성들에게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 가운데에서 또 다른 “새벽 이슬 같은”이들이 주님께 나아와 자신을 헌신할 것입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남(중앙 아시아)연합회 지역은 5개국(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관할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재림교인은 6715명에 지나지 않고, 95명의 목회자들이 남한의 40배가 넘는 지역에서 186곳의 교회와 예배소들을 섬기며 일하고 있습니다.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이고, 아직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연약해서 자립을 생각하기가 매우 힘들고, 목회자들의 급여도 US$ 50~150에 불과해서 부부가 함께 일하지 않으면 이 나라들의 일반 국민들 수준으로도 살아갈 수 없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러한 지역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터어키,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집트, 이란,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아제르바이잔 등의 회교 국가들이 그렇고, 아르메니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아 등의 구 소련 국가들도 복음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도 한국 재림 교회의 힘 있는 복음 개척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빛을 들고 가야하는 선교지들에는 도전이 있고, 이에 대한 사단의 응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단의 강력한 힘을 막아서시는 하나님의 힘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이 이 일을 할 수 없다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책에선가 읽고 메모해 두었던 글 귀가 있습니다.
“젊은이만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은 평범해지는 것이다.”(The greatest sin that only the young can commit is to become ordinary.)
저는 꿈을 꿉니다.
한국 재림 교회의 젊은이들과 젊은 목사들이 복음의 빛을 간직하고, 오대양 육대주의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나아가는 날을...
내 구역이 어떻고 네 구역이 여기까지고 하는 말이 아니라, 복음을 처음 대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들고가서 빚을 갚는 그 날을...


* 정근태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05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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