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첫 소설집 ‘체로키 부족’ 낸 허혜란씨

“나름대로 살아가는 거야. 너도, 나도. 제대로 섞여 살면 거기가 가족이고 민족이야.”



마흔두 살 된 모슬렘 남자의 네번째 부인으로 시집가게 된 스물한 살의 고려인 처녀 아냐. 100여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은 한낱 소수민족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국어는 필수 언어가 아니다.

허혜란씨의 첫 소설집 ‘체로키 부족’(실천문학사)에 실린 단편 ‘아냐’에 그려진 고려인들의 현실이다. 이들의 삶이 어떻게 그의 소설속으로 뛰어들어왔을까, 궁금했다. “20대 후반에 만 2년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해외봉사단원으로 체류했어요. 고려인 집단농장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어요.” 대학 졸업 후 하는 일마다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 우즈베키스탄행을 자처했단다. “위태로운 시간들, 혼자 있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그게 평생 가는 것 같아요. 한번 인연이 시작되니 계속 이어지네요.”

소설집에 실린 9편의 단편 중 4편이 ‘아냐’처럼 우즈베키스탄의 경험과 연결돼 있다. 이산 고려인들을 매일 부딪히면서 그는 특히 민족과 언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듯싶다. 가족을 위해 언어와 종교가 전혀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아냐(‘아냐’),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갖췄지만 늘 일그러진 형체만을 그리는 늙은 화가(‘내 아버지는 서울에 계십니다’)는 그가 직접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고려인들의 이야기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내 아버지는 서울에 계십니다’는 절절하다. “노예는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고 국가도 없다”며 늘 일그러진 형체만을 그리는 늙은 화가는 BBC에서 ‘아시아의 피카소’라고도 칭한 고려인 화가 고 신순남(1928~2006)을 모델로 했다. 그런 할아버지의 그림을 몰래 내다 팔아서라도 생활을 이어가야 하고, 서울로 가버린 아버지를 찾아가고픈 손자의 이야기는 아리다.

뿌리내리지 못하고 사는 삶에 대한 관심은 비단 우즈베키스탄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 그치지 않는다. 극도로 외로움에 떨며 문자로 누군가와 소통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북치는 소년’이나 한없이 자유로웠지만 결혼 이후 서로를 구속하면서 반복되는 지리멸렬한 삶에 대한 회의를 담은 ‘체로키 부족’ 등에서도 확인된다.

작가가 택한 삶의 방식도 정주보다는 유목민의 삶과 닮은 듯했다. 아이는 홈스쿨링으로 가르치고 매년 한두달 짬을 내 함께 여행을 다닌다는 그는 2004년 일간지 신춘문예 2관왕의 영예를 안고서도 이제야 자신의 이름이 박힌 첫 소설집을 내게 된 데는 여행도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하나 길 위의 삶이야말로 그의 문학의 근원이 아닐까. “어디서건 만족하고 최선을 다하고 살면 그게 문학이고 삶이다”라고 당당히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한 그는 남들이 부러워할 법한 신춘문예 2관왕이라는 이력에 대해서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고 했다. “2년 정도 주저앉아있었어요. 문학이 재밌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이제 겪어야 할 시기를 겪은 기분이에요.”

앞으로는 글쓰기가 즐거울 것 같다는 그는 장편에 대한 구상도 슬쩍 내비쳤다. “종교나 민족, 문화가 서로 다른 사랑에 대해 쓰고 싶어요. 모슬렘 여인과 다른 종교를 가진 남자의 사랑과 갈등을 구상 중이에요. 지금 우즈베키스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글·사진 윤민용기자>
입력: 2008년 06월 18일 17:52:36
디지털 경향신문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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