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2872045_00486799201_20131028.jpg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김삼웅 지음
현암사·1만8000원

 

조국은 그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머슴이었고 그 역시 머슴살이를 했다. 광부로 떠돌았고, 먹을 것, 잘 데가 없어 식객승이 됐고 포수로서 생계를 이어간 하층민이었다. 조실부모했고 일제의 고문으로 아내를 잃었고 장남은 의병투쟁 중 전사했다. 온몸으로, 굴곡진 한민족의 역사를 겪었다. 독립운동의 분열, 밀정의 테러,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헌신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무장투쟁을 지휘하며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좌파 독립운동가’라는 딱지 탓에 ‘대한민국’은 그의 업적과 일생을 폄훼, 또는 왜곡했다. 한글도 겨우 읽을 만큼 배움이 없고 그럴듯한 가문의 배경도 없었기에 그를 기리는 작업도 미미했다. 카자흐스탄, 저 멀리 타향에 묻힌 그의 유해는 70년 동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언론인이자 역사연구자인 김삼웅씨가 ‘잊혀진 영웅’ 홍범도(1868~1943년) 장군의 일생을 복원했다. 태어날 때부터 혜택받지 못한 삶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나라사랑’은 척박한 운명에서 비롯됐다. 함경도 북청, 험준한 산자락을 누비며 호랑이를 잡았던 그는 일제 당국의 ‘총포화약류단속법’에 맞서 산포수들을 조직해 의병활동에 뛰어들었고, 곧 기민한 전투력과 용맹함을 발휘해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일제의 대대적인 섬멸 작전으로 1908년 이후 그의 활동무대는 중국과 러시아로 옮겨간다. 3·1운동 이후 대한독립군을 창건했고,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압승을 거뒀다. 조선총독부 기록을 보면, 일제는 그를 제거 대상으로 보면서도 호걸풍의 타고난 인품과 지략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청산리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홍범도는 김좌진, 이범석에 비해 홀대받았다. 이는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끌었고, 이승만 정부 때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반공주의자 이범석이 후일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한 홍범도에 대한 반감으로 그의 활동을 축소하는 증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러시아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은 1921년 내부 파쟁으로 수백명이 숨진 러시아 자유시 참변 이후 세가 꺾였다. 홍범도 부대도 소비에트 적군 여단 휘하로 들어간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해 레닌한테서 금화와 권총을 선물로 받고 트로츠키를 직접 만나는 등 예우를 받고 소련공산당에도 입당하지만, 소련의 권력투쟁과 스탈린 독재를 피해갈 순 없었다. 결국 1937년 카자흐스탄의 반사막지대로 강제이주당한다.

 

 

불우한 노년이었지만 그는 기개를 잃지 않았다. 1941년 독일-소련 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일본의 동맹국 독일을 무찔러야 한다는 생각에 73살 고령임에도 ‘현역징집’을 간청했다. 지은이는 조선 말기 권력을 쥐었던 세력부터 일제강점기, 미군정 시기,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100년 넘게 기득권을 누린 세력과, 자신의 안위 대신 대의를 추구한 홍범도의 빛났지만 스산했던 삶을 대비시킨다.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08731.html

SITE LOG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