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함경도 농민들이 러시아 연해주이주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이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올해가 아닌 내년(2014년)에 다양한 150주년 행사를 거행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고려인협회를 비롯한 구소련지역의 한인 사회에서는 1864년을 최초의 이주로 공식화한 바 있다. 10년 전 140주년 행사를 두고 논란을 벌인 끝에 내린 공식적 결정이었다. 그 근거는 두 가지다. 제정러시아시기의 공식문건에 한인들이 나타났다는 기록, 그리고 1914년 한인들이 한인노령이주50주년 기념행사를 계획·추진했던 사실이다.

여하튼 한국학계의 정설인 '1863년 최초이주설'에 따르게 되면, 구소련지역 한인이민사에서 올해는 참으로 뜻 깊은 해가 된다. 이 뜻 깊은 해에 시의적절하게 간행된 책이 원로언론인 김호준이 집필한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주류성 펴냄)이다.

소련붕괴 이전 시기인 1980년대 후반에 신연자의 <소련의 고려사람들>(동아일보사 펴냄),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된 고송무의 <쏘련의 한인들>(이론과 실천 펴냄)이 간행된 바 있다. 전자는 소련시기에 중앙아시아를 방문하고 썼다는데 의미가 있지만 여행기에 가깝고, 후자는 개설서 형식을 취했으나 한인들의 이주사와 언론, 문화예술 활동 등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서대숙 교수편집하여 1987년에 간행했던 영문서 <Koreans in the Soviet Union>(University of Hawaii 펴냄)이 1989년 번역·출간됐다. 이 책 <소비에트 한인백년사>(이서구 옮김, 태암 펴냄)는 재미한인학자(서대숙, 신연자)와 일본인 학자들(와다 하루키, 하라 테리유키, 기무라 히데스케)이 쓴 논문들을 엮은 책이다.

2000년대 들어와 러시아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구소련지역의 한인역사를 다룬 개설서가 간행되었다. 우선 러시아학계에서는 2004년 '한인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보리스 박과 니콜라이 부가이의 공저인 <러시아에서의 140년간 : 재러한인이주사>(시대정신 펴냄)이 한글러시아어로 동시 간행되었다.

이어 한국학계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기획한 '재외동포사총서' 시리즈의 하나로 <러시아·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국사편찬위원회 펴냄)가 간행되었는데, 여러 학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였다. 이 두 책은 러시아와 한국 학계의 성과를 각각 반영하고는 있지만, 양국 학계의 연구 성과가 상호간에 충분히 활용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그동안 구소련지역 한인역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명실상부한 개설서 편찬이 힘들었던 것은 개별학자들의 탓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학계의 연구 성과가 부족한 때문이다. 여전히 사실적 측면에서조차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는 오랜 냉전으로 인한 교류의 부재, 러시아어라는 언어적 장벽, 거주지역의 지리적 광범함과 이주·재이주와 정착과정의 복잡다단함, 러시아와 한국학계의 교류 결여와 연구자의 수적 부족 등 여러 원인에서 비롯된 바 크다. 이에 더하여 학문적 논쟁이 충분치 못하여 한국과 러시아 학계 모두 사실적, 해석상의 오류가 방치되고 되풀이 되고 있는 점도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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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은 이러한 연구 환경의 제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문역사학자가 아닌 저자가 '거대한 구상'을 세우고 학계의 성과들을 널리 섭렵하여 성실하게 반영하고 자신의 개인적 연구를 바탕으로 총 17장, 550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로 정리해 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2002년 키르기즈스탄 방문 이후 고려인 연구를 위해 보낸 10여 년의 세월과 구소련지역 곳곳을 직접 답사하며 다양한 고려인들을 인터뷰하고 사진과 문헌 자료들 수집한 저자의 열정과 노고가 돋보인다.

우선 이 책은 그 서술내용이 1860년대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150년에 집중되어 있지만, 고대와 중세시기의 한반도-서역교류사로서 7세기의 '고구려 사절단, 고구려 멸망 이후 끌려간 고구려유민의 후손 고선지(高仙芝)의 활약,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통일신라의 혜초(慧超) 등을 고려인 역사의 전사(前史)로서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긴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에 더하여 다루고 있는 지리적 범위 역시 유럽러시아로부터 러시아 원동의 사할린에 이르기까지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 유라시아대륙의 거의 모든 지역을 망라하고 있다.

다루고 있는 주제들 역시 이주사, 인구변화, 일상생활, 항일독립운동, 공산주의운동, 한인사회의 변화과정, 시베리아내전이후의 소비에트화와 집단화과정, 1937년 강제이주, 중앙아시아에서의 정착생활과 문화활동, 각 지역(국가)의 고려인 분포, 출세한 고려인들의 면모, 고려인의 문화정체성 등 고려인 역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부문을 다루고 있다. 특히 1930년대 전반에 시작된 고려인 엘리트에 대한 대탄압과 1937년의 강제이주, 이후 고난에 찬 정착과정과 재이주에 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노력전선(勞力戰線)'에 투입되었던 고려인 노동군(勞動軍)에 관한 부문 역시 한국학계에서 크게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으로, 노동군 출신들의 생생한 경험이 담긴 인터뷰들은 저자의 값진 발굴성과라 할 수 있다. 이후 중앙아시아 내에서 고려인들이 수행한 다양한 농업경영, 특히 고려인 특유의 고본질에 대하여는 그 기원으로부터 조직과 경영 방식, 경제적, 사회적 의미와 러시아인들의 평가 등의 다양한 각도에서 소개하고 있다.

1945년 광복 후 북조선에 진주한 소군정에 협조하여 북조선 정권 성립에 참여한 이른바 '고려인 군단'의 활동과 운명에 관한 부분은 독자들의 특별한 흥미를 끈다. 저자가 자평한 바,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한국 속의 고려인'에 대해서도 최초로 정리해 놓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구소련지역을 벗어나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일본 또는 중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까지 향후의 연구에서 보완된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은 저자가 많은 시간을 들여 발로 뛰면서 채록한 고려인들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 점인데, 고려인들의 생생한 삶과 경험이 잘 드러나 있다. 연해주를 비롯한 바이칼호수 동쪽 러시아지역을 일컫는 일본식 표현 '극동(極東)' 대신에 '원동(遠東)'이라 표현하고 있는 점도 깊은 공감을 갖게 한다. '원동'이란 말은 고려인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원초적 고향으로서 이주와 정착 그리고 강제이주 등의 역사적 선조들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와 정서가 함축된 표현으로 단순한 명칭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주제의 모든 측면에서 구소련지역의 한인 역사에 대한 포괄적이며 총체적인 역저라 할 수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전문적 학술서라기보다는 대중교양서에 가까운 저서라 할 수 있지만, 현시점에 고려인에 대해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종합적인 교양서로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언론인으로서의 오랜 경력에서 비롯된바 물 흐르듯 유려한 문체와 문장,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주제에 따라 형식이나 체제에 얽매이지 않은 독자 위주의 서술방식이 읽기수월하여 훌륭한 대중서로서 손색이 없다. 학계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한 참고문헌과 색인을 첨부했고, 인물 사진을 비롯하여 본문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는 다양한 사진들을 풍부하게 싣고 있어 대중강좌나 강단의 교재로서도 활용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대중서이기 때문에 엄격한 학문적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지만, 서술과정에서 의존하거나 인용한 저서나 논문에 서지적 전거를 명기하고 있지 않은 점이 아쉽다. 그 결과 논쟁적인 부분이나 의심나는 구체적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특히 인용문의 경우, 특히 문헌에서 인용해온 경우에는 그 전거를 명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인터뷰 일시와 장소를 명기하면 좋지 않을까 한다.(대부분 연월은 표시하였지만)

간혹 발견되는 사실적 오류와 부정확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한국역사학계의 구체적인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저자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계 자체의 연구 성과가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은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

한말 의병활동에 참가한 고려인 수가 10여만 명에 달한다고 한 서술(22쪽), 1907년 8월에서 1908년 2월 사이에 1700회 전투에 달했다는 서술(54-55쪽), 이범윤 휘하의 의병이 4000명에 달했다는 서술(52쪽) 등은 명백한 과장으로 전문역사학자들도 무심코 인용하게 되는 잘못된 원전의 탓이다.(당시 연해주 전체 고려인수가 10만 명 안팎이었다!)

고려인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숫자가 다르게 제시된 부분 역시 서로 상충된 통계를 제시한 한 예이고(286쪽, 269쪽), 1910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든 의병부대를 하나로 총합한 군사조직이 창의회(倡義會)였다는 서술(55~56쪽, 원래는 '13도의군'이다)은 저자가 학계의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경우이다.

영국의 저명한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Isabella L. Bird)의 남우수리 지방 방문시기를 1897년으로 서술하고 있는 점이나(36~37쪽), 1918년 10월 최초의 고려인 빨치산 부대 조직자가 박일리야였다는 서술(78쪽, 원래는 박이반 다닐로비치다), 하바롭스크에 거리이름을 남긴 1929년 동중철도 사건의 영웅 김유경을 김유천으로 잘못 서술하고 있는 것(79쪽) 등은 일반적으로 잘못 알려진 사소한 오류이다.

1914년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하여 권업회가 군사지휘부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다고 파악한 것은 학계의 잘못된 성과를 반영한 것이다.(66쪽), 권업회는 러시아당국의 허가를 받은 합법적 공개적 단체인데 반하여, 대한광복군정부는 비합법적, 비밀조직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즉, 비입적 여호인들인 이상설, 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이 합법단체인 권업회에 참여함과 동시에, 비합법단체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면서 러시아당국의 정책을 고려해야만 하는 입적 원호인들에게는 이를 숨겼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향후의 구소련지역 한인문제 연구의 진전을 위하여 두 가지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고려인'이란 명칭에 관한 문제이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고려인'이라는 명칭을 쓰게 된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고려인'이란 명칭은 구소련지역이나 한국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로서 앞으로도 이 명칭이 굳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저자가 '고려인'의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거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앞에 소개한 여러 개설서의 제목들로부터 알 수 있는 바, 구소련지역의 한인들에 대한 명칭은 사용하는 주체와 대상 시기와 의도에 따라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주의적 입장에서 다각적인 측면의 검토가 필요한 이유다.

저자는 1867~1869년에 남부우수리를 여행한 러시아 여행가 프르제발스키(N. M. Pruzheval'skii)를 인용했다. 당시 그가 만난 이주 한인농민들이 스스로를 '고려사람'을 뜻하는 '까울리(Kauli)'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연해주가 고구려 땅이었음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해석했다. 이로부터 한인들의 강력한 역사적 연고의식(historical franchise)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후 다양한 명칭에서 사용된 '고려'나 '고려사람' '고려인'에서도 이러한 의식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저자가 '고려인'을 구소련지역의 동포들의 명칭으로서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강력한 논거이다.

일반적으로 한민족과 오랜 역사적 인연을 가져왔던 타민족사람들, 특히 아시아내륙지방의 사람들이 한인들을 '까울리(Kauli)'로 불렀다는 기록은 많다. 예를 들어 1910년대 후반 몽골인들은 울란바토르에 거주했던 세브란스 출신 의사 이태준을 '까울리 의사'라고 불렀다. '까울리(Kauli)'는 주지하는 바 '고(구)려'와 역사적 연원을 둔 명칭임은 명백하지만, 우리 동포들이 스스로를 부른 자칭이기도 했고 다른 민족이 우리 동포들을 불렀던 타칭이기도 했던 것이다.

원동러시아의 한인사회에 한정할 경우, 대체로 제정러시아시기에는 '한인'과 '조선'이 보다 많이 쓰였다. 대한제국으로 멸망한 탓에 '한인사회당,' '대한광복군정부' '대한국민의회' 등에서 볼 수 있는 바, '대한제국'을 염두에 둔 '한인'이 많이 쓰이게 된다. 러시아혁명 이후에는 러시아인들, 특히 러시아 혁명세력들과의 접촉이 빈번해졌고 점차 러시아어를 많이 쓰게 되면서 '고려'라는 용어가 자주 쓰였다. 1923년 3월 이후 1937년 강제이주까지 연해주 지역에서 간행된 한글신문 <선봉>을 보면, 러시아어인 '까레이츠'(Koreits)와 연계되어 '고려인' 또는 '고려사람'이 널리 쓰였다.

대략 1934년 8월 이후에는 '조선' '조선인'이 많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제2세계대전이후 북조선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소련군과 함께 북조선에 나갔다 온 사람들, 그리고 사할린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주로 남한 출신)이 <레닌기치> 등 언론·문화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91년의 소련붕괴 시점까지 이어진다. 즉, 1950년대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레닌기치> 신문의 기사에는 '고려사람'보다는 '조선사람'이, '고려극장' 보다는 '조선극장'이라는 말이 선택되었다.

한편 1985년 중앙아시아를 방문한 재미학자 신연자에 따르면, 당시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노년기 한인들은 자신들을 '고려사람'이라고 불렀고 우리말을 모르는 젊은 후세들은 스스로 러시아어로 '소비에트 카레이츠 (Sovietskie Koreitsy)'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소련의 고려사람들>, 4쪽)

저자가 '고려인' 앞에 '유라시아'를 덧붙인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1991년 소련붕괴 이후 구소련지역 한인동포들은 스스로를 이전의 '소비에트 카레이츠 (Sovietskie Koreitsy)' 대신 '유라시아 카레이츠'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1993년에 간행된 박보리스의 저서 <제정러시아 시기 한인들> 서문에서 고려인 철학박사 유가이 게라심(G.A. Iugai)이 밝힌 바 있다. 즉, '유라시아'에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그리고 중앙아시아가 포함되고 이 지역의 한인들을 '유라시아 카레이츠'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비에트'라는 정치공동체 명칭 대신에 '유라시아'라고 하는 '지리적 개념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를 논하고 싶다. 고려인의 정체성에 관한 저자의 인식은 혈통주의적, 동포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것같다. 아울러 저자는 '유라시아 고려인'들이 '역사적 조국'인 한국과의 만남으로 통하여 이들의 정체성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는 것 같다. 돌아 보면 그동안 한반도와의 연계성을 추적하는 혈통주의적, 동포주의적 정체성론이 해외동포, 특히 고려인사회에의 학문적인 접근은 물론 정부와 민간차원의 동포 관련 사업에서 주류를 차지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학자 한발레리는 한국학자들이 강조하는 '통일된 한국적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어떠한 민족적 정체성도 추상적인 것으로서 또는 초역사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하면서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역사적 존재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우즈베키스탄 한인의 정체성 연구>(권희영·Valery Han·반병률 지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펴냄) 70쪽) 한반도 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한반도 또는 남북 그 하나에 틀을 맞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라 할 수 있다.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의 출간을 계기로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한반도의 '역사적 조국'이 역사적 경험과 가치를 달리하는 유라시아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포용할 수 있는 자격 있는 주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한반도 내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이 서로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명실상부한 국제주의적 가치에 입각한 인류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Pressian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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