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만 해도 카자흐스탄의 UN난민고등판무관실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크셋은 2008년에도 카자흐 경찰에 의해 구속되어 심하게 구타 당햇던 적이 있었다. 당시도 UN과 스웨덴, 미국 등이 마크셋의 망명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UN과 미국 등은 마크셋에게 “자녀를 생각하라, 당신만 원한다면 망명처와 함께 망명국의 국적을 얻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하며 망명을 설득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마크셋은 “당시나는 막 새로운 교회를 개척한 상황이었다. 감사하는 마음도 있고, 망명하면 좀더 편해질 것 같기도 하여, 마음이 기울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금식을 하며 기도한 후 카자흐스탄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의 열매로 이후 몇 년 사이에 50명 이상의 신자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번에 UN이 그의 망명을 추진하는 것은 두 번째인 셈이다. 그는 다시 기도하며 하나님께 물었다고 한다. “만일 내가 이 곳을 떠난다면, 이 교회는 누가 돌보아야 합니까?” 그에 대한 기도의 응답은 “그 교회는 너의 교회가 아니라 나의 교회이다.” 그 때 그는 이제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남아 있는 교인들 사이에 충분히 능력이 되는 이들 몇 사람을 모아 교회를 이끌어갈 리더 그룹을 조직했다. 이처럼 마크셋이 결심하자 UN은 그의 망명을 위한 행정절차에 돌입했다. 작년 10월에는 변호사를 통해 마크셋에게 망명신청서를 보냈고, 마크셋은 이 신청서에 옥중에서 서명했다. 이 신청서에 따르면, UN이 주선하는 어떠한 망명지라도 받아들여 떠나게 되어 있었다. 다만, 한 곳의 예외가 있다면 우즈베키스탄이 있었다. 물론 UN이 우즈베키스탄을 그의 망명지로 제공할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절차는 의외로 늘어졌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감옥에서의 시간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하나님의 약속이 의심스러워지기도 했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 분별한 것은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은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고, 나는 다시 힘을 얻곤 햇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11월 7일, 아내 아이굴은 스웨덴이 망명지를 제공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UN으로부터 들었다. 그녀는 이 소식을 듣고 기쁨에 큰 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응답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들의 첫 번째 기도는 어느 나라라도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결정을 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첫 번째 기도제목이었다면, 두 번째 기도제목은 카자흐스탄이 자신들의 출국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다. 다만 UN측은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했다. 이는 감옥에 있는 남편의 안전을 고려한 조치였다.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면, 여론이 움직일 것이고, 자칫 그들에게 불리한 여론이 형성되면 모든 것이 꼬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감옥에 면회를 가서 남편에게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다만 암시는 줄 수 있었다고 한다.

모든 절차는 조심스럽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난민고등판무관실은 아이굴과 마크셋이 최종적으로 망명에 동의할 때까지 스웨덴 측과의 협의도 중단했었다. 이들이 망명에 동의한 후에야 스웨덴과 협의를 시작했다. 또 스웨덴이 그들의 망명을 수락할 때까지는 카자흐스탄 정부와는 협의도 시작하지 않았다. 스웨덴이 망명을 수락한 후에야 카자흐 정부와 접촉하여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아이굴은 모든 것이 진행되는 상황을 본인은 알면서도 남편은 물론 아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 한참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출국 이틀 전에야 출국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그때도 출국 사실만 알렸을 뿐 어느 나라로 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크셋도 마지막 단계에서 스웨덴이 자신들을 받아주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이 감옥에서 안전하게 걸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웠다. 실제로 그 때부터 3주의 시간이 또 흘렀다. 이 때가 11월 말쯤이었다. 아이굴의 인내심도 바닥에 다다르고 있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바로 이즈음인 11월 30일 쯤, UN측으로부터 사무실로 나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리고 바로 그날 UN 사무실을 찾아가 바로 조금 전에 카자흐스탄 정부가 마크셋의 석방과 안전한 출국에 동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크셋은 지금도 카자흐 정부가 왜 자신의 석방에 동의 했는지 잘 모른다고 한다. 다만 2011년 6월 이후, 국제사회와 인권기관으로부터 들어온 지속적인 압력에 카자흐 정부가 굴복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2011년 6월, 카자흐 정부는 28명의 우즈베키스탄인들을 송환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우즈벡으로 돌아가 심한 고문을 받은 것이 알려졌고, 이에 인권단체들이 카자흐 정부를 대대적으로 성토하고 나선 것이다. 이 압력에 밀려 카자흐 정부는 카자흐가 국제법과 조약을 위반한 사실을 시인하고 재발을 방지하겠다고 약속한 터였기 때문에 마크셋을 또 송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마크셋의 석방은 또 며칠 미루어졌다. 우즈벡 첩보당국이 마크셋이 석방되면 바로 그를 납치해 국경 넘어로 데려갈 수 있다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마크셋은 12월 4일에 매우 비밀리에 석방되었고, 석방된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출국 비행기 안에 앉게 되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UN관리들도 마크셋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기 직전까지도 작전의 성공을 확신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들은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확인하고야 모든 절차가 성공했음을 확신하고 그의 망명 성공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한편 마크셋도 자신이 석방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루 전에야 알았다고 한다. 아이굴이 하루 전인 3일 오후에야 마크셋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다음날 석방되고 석방되자마자 UN관리에게 신병이 넘어가 공항에서 가족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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