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증인, 무인석

2004.11.30 16:49

정근태 조회 수:3809 추천:40



[한겨레 2004-11-29 16:21]  
  

[한겨레] 터번 쓴 무인 복주머니 찬 까닭은?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에서 동쪽으로 35리쯤 가면 외동면 괘릉리에 자리한 괘릉에 이른다. 사적 제26호인 괘릉은 신라의 수많은 능 중에서도 둘레돌이나 돌사람, 돌짐승 등의 외호석물을 골고루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돌새김기법 또한 뛰어나서 신라 능묘의 대표적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능묘의 주인공 문제를 비롯해 능 앞에 배치되어 있는 외호석물로서의 무인석상의 외래적인 모습이나 돌사자의 이례적인 위치 등 일련의 문제에서 이론이 분분하다. 그 중에서도 무인석상을 에워싼 논란이 가장 많다.
괘릉이란 이름의 유래부터가 아리송하다. 물이 고여있는 연못 자리에 능을 쓰다보니 왕의 관을 돌 위에 걸터놓고 흙을 쌓았다고 하여 ‘걸괘’자를 붙인 ‘괘릉’이라 이름하였다는 속설이 있다. 왕릉터라면 명당 중의 명당일 턴데, 굳이 물 고인 연못지를 그런 곳으로 택했다는 것은 유례 드문 기문이다. 그래서인지 능비도 없어, 그 주인공을 38대 원성왕(785~798년 재위)으로 어림잡고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성왕릉은 토함산 숭복사(일명 동곡사)에 있다고 했는데, 그 절터가 괘릉 부근에서 발견됨으로써 그러한 추측의 근거로 삼고 있다.

소나무숲이 주변을 두텁게 둘러싸고 있어 청신하고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괘릉은 크게 봉분과 그 전방에 배치된 몇 가지 석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곳에서부터 동서 25m 사이에 돌사자 2쌍, 문인석과 무인석, 화표석이 각각 1쌍씩 있다. 그중 화표석은 없어져 버렸다. 주목을 끄는 것은 이색적인 용모와 복장을 하고 있는 한 쌍의 늠름한 무인석이다. 우리가 흔히 절에서 보는 수호 담당의 사천왕이나 역사상 같은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상징적 존재와는 달리, 너무나 사실적인 인물 형상으로 능을 지키고 서있다. 경주의 고분군과는 좀 동떨어진 이곳에 통일신라 시대의 가장 완벽한 능묘형식으로 조영된 괘릉에 나타난 이 이방인은 과연 누구이며, 왜 당당한 외호석물로 등장했을까? 지난 80여년간 구구히 논의해 오던 문제다.

그 해답은 우선 무인석상의 실체에서부터 찾아봐야 할 것이다. 석상은 신장이 약 2m50㎝쯤 되는 장대한 체구로, 약간 뒤로 젖히고 허리를 튼 자세로 서있다. 주먹을 불끈 쥔 한손은 가슴에 대고, 다른 손은 발등까지 처진 길이 1m 정도의 막대기(무기?)를 단단히 잡고 있다. 부릅뜬 큰 눈이 치켜올라갔고, 쌍거풀진 눈이 푹 들어가 눈썹이 두드러진다. 큰 코는 콧등이 우뚝하고 콧끝이 넓게 처진 매부리코이며, 콧수염이 팔자로 양끝이 말려올라갔다. 큰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큰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귀밑부터 흘러내린 길고 숱 많은 곱슬수염이 목을 덮고 가슴까지 내리닿고 있는 것이 퍽 인상적이다. 머리에는 중앙아시아나 아랍식 둥근 터번을 쓰고 있다.

어깨가 넓으며 목과 허리에서 한번씩 꺾여 몸의 중심이 한쪽 다리에 실리면서 자신있게 버티고 서있는 자세와 양팔의 위치, 그리고 넉넉한 얼굴의 표정 등은 실로 외호담당자로서의 무인 형상으로는 손색이 없다. 이러한 외모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심목고비(深目高鼻)한, 즉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높은 서역인상이다. 동양사에서는 흔히 아리안계나 터키계의 인종상을 심목고비로 묘사한다. 그런데 무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의상은 의외로 갑옷 같은 딱딱한 복장이 아니라, 장식이 별로 없는 부드러운 느낌의 옷이다.

이러한 심목고비한 무인석상은 괘릉 뿐만 아니라, 경주시 도지동에 있는 성덕왕(33대, 702~736년 재위)릉과 경주 북방 안강에 있는 흥덕왕(42대, 826~835년 재위)릉에서도 발견된다. 성덕왕릉의 무인석은 머리부분만 남아있으며 얼굴의 파멸이 심하여 형태를 가려내기가 어려우나, 흥덕왕릉의 무인석상은 괘릉의 것과 엇비슷하여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사향길에 접어든 후대 신라사회의 퇴조를 말해주듯 새김기법에서는 둔화와 부진을 보여주고 있다. 즉 눈이나 코, 입 등 얼굴 형상에서 선이 뚜렷하지 않고, 한 손은 무기를 들고 다른 손은 주먹을 쥔 채로 직립해 있는 부동자세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며, 목이 바르고 어깨가 으쓱 올라붙어 부자연스럽고 생동감이 별로 없다.

두 왕릉의 지킴역을 맡고있는 무인석들이 비록 위치나 새김기법에서는 약간의 변화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눈과 코의 형상, 양 팔의 위치와 형태, 장대한 체구, 복장 등에서 공통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총체적인 모습이 심목고비한 서역인의 형질적 특색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무인석은 서역인을 직접 모본으로 하여 돌새김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인들이 서역인 무인석을 왕릉의 외호물로까지 택한 것은 그들의 장대한 위용과 이색적인 용모에서 오는 수호적 기능과 역할을 노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신라인들이 별난 서역인 형상을 능의 외호물로 취한 것은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호인용(胡人俑, 흙으로 만든 서역인상)을 본받았다는 것이 지금까지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그 근거는 괘릉이나 흥덕왕릉의 무인석상 모습이 중국의 명기용 호인용을 닮았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역 무장들의 장대한 체구와 색다른 용모를 모델로 하여 무인상의 호인용을 만들어 능묘의 명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으로부터의 문물을 섭취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던 신라 귀족들이 지킴역의 명기로 사용되는 호인용 형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논리다. 그러나 당나라의 능에서 출토된 호인용과 신라의 무인석을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그것은 차원을 달리한 서역문물의 수용임을 발견하게 된다. 명기인 호인용의 크기는 30㎝ 안팎에 불과하지만 괘능이나 흥덕왕릉의 외호물인 무인석은 그 8배에 달하는 대형조각물이며, 기법에서도 선명성이나 생동감이 훨씬 더 넘쳐 흐른다. 뿐만 아니라 호인용은 갑옷을 입고 있으나 무인석은 평범한 복장(호복) 차림으로 크게 다르다.

이러한 수용은 서역인에 대한 직관, 즉 현장의 서역인을 직접 모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무인석에 나타나고 있는 얼굴의 형상이라든가 터번, 복장은 분명히 서역인의 특색 그대로이며, 그 선명성과 정확성 또한 놀라울 정도다. 이것은 서역인의 용모나 복식에 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조공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중국 호인용의 무사복과는 달리 민간복을 입히고 체구나 형상 자체를 크게 확대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파악과 지견에 기초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서역인에 대한 현장모델화가 없이는 이토록 정확한 형상 조각은 도무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현장모델은 바로 일찍이 이상향 신라를 찾아온 서역인들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괘릉 무인석이 오른쪽 옆구리에 지름이 10㎝ 가량 되는 복주머니를 차고 있는 모습이다. 복주머니는 동양, 특히 한국의 고유한 장신구로서 신라 땅에서 서역인이 복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조각상의 예술성보다는 서역인의 신라 내왕이나 정착에 바탕을 둔 두 문명의 융합 결과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밖에 1986년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출토된 서역인 토용(土俑, 흙으로 형상을 만들어 구은 것)상은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만들어진 이 무덤에서는 채색된 인물 토용들이 나왔다. 이것은 순장하는 풍습이 사라진 뒤에 그것을 대신해 무덤의 주인공을 수호하도록 토용을 만들어 부장한 것으로 짐작된다. 무덤의 주인공은 진골 왕족으로 추정되며, 인물 토용은 남자상이 15점, 여자상이 13점으로 모두 28점이다. 그런데 남자상 중 용모가 괘릉의 무인석과 매우 비슷한 한 인물(키 17㎝)이 손에 홀(笏)을 잡고 흡족한 표정을 지으면서 서있다. 그 말고는 홀을 잡은 사람이 한두명밖에 안된다. 홀은 임금을 만날 때 신분을 상징하는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는 패물이다. 조복으로 보아 그는 지체 높은 문관임이 틀림 없다. 7세기로 추정되는 경주 황성동 돌방무덤에서도 여러 점의 토용이 나왔는데, 그 중에도 서역인들 고유의 모자인 변형모(弁形帽, 고깔형 모자)를 쓴 이색적인 남자상이 끼어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무인석이나 토용은 단순한 형상적 기능을 노린 상징물이 아니라, 늦어도 7세기 경부터는 서역인들이 신라땅에 와서 살면서 무장이나 문관으로까지 기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상당한 정도의 사실성이 투영된 증거물이다. 기나긴 세월의 풍진 속에서도 의연히 서있는 저 의인화된 무인석이나 토용은 우리와 서역인들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고받으면서 삶을 함께 해 온 그 옛날의 만남과 어울림의 역사를 오늘도 변함 없이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다.



정수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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