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후반 거란인들은 당시 강성한 고구려의 압력을 피하여 요서(遼西)지방으로 남하해 오면서 중국과의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국가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거란은 북조(北朝)에 속한 여러 왕조에게 조공을 바치며 그 안전을 보장받으려했다. 당(唐)은 요주(遼州) 총관부, 송막(松漠) 도독부를 이 지역에 설치하였고, 거란족을 기미주(羈縻州)로 편성하여 당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중국 사회가 혼란해 지고, 위그르 제국의 세력이 쇠퇴해 가자, 야율(耶律)부족 출신 아보기(阿保機, 872-926 - 그는 오늘날 차하르(察哈爾, Chahar)성(省) 지역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였고, 908년 8개 부족을 통합하고 추장이 되었다.)는 흩어진 거란 부족을 통합하고 한인(漢人)을 거란 내부로 강제 이주시켜 거란 제국을 세웠다.

그는 924년에 이르러 몽골리아에서 위그르인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운 키르기즈 부족들을 격퇴시켰다. 그는 계속해서 인근 지역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926년, 고려(高麗) 원정 중에 사망하였다. 이후 거란은 남으로 강북의 연운(燕雲) 16주까지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였고, 북방에는 유목민의 요소를 가지고 남방에는 정착민의 요소를 가진 이중 체제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국가 명칭도 요(遼)라는 중국식 이름을 채택하였고, 947년부터 1125년까지 중국을 통치하였다.

거란은 계속적으로 고려(高麗)를 침공하며 그 힘을 잃어 갔는데, 1010년, 1014년, 1018년에 계속된 고려 원정은 계속적인 실패로 그 막을 내렸다. 특히 마지막 전쟁에서 요(遼)는 고려의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귀주(龜州)에서 싸움을 벌여 대패하였다(龜州大捷). 발해(渤海)와 여진(女眞), 그리고 고려의 계속적이고 끈질긴 저항은 요(遼)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결국 요(遼)는 1114년에 이르러 여진족(요(遼)를 멸망시킨 여진족은 금(金, 1122-1234)을 세웠으나, 몽골에 의해 멸망당했고, 그들은 다시 새로운 나라를 형성하지 못하고 중국에 동화되었다.)에 의해 붕괴되었으며, 1125년에 마지막 황제가 퇴위됨으로 종언을 고하게 된다.

요(遼)가 여진(女眞)에게 멸망하기 직전에 요의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 Yeh-lü Ta-shih, 재위 1124-1143)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초원 지역으로 도망하여 오늘날 추구착(Chuguchak) 근처의 타르바가타이(Tarvagatai)에 있는 이밀(Imil)에 근거를 두고, 돌궐계 국가인 카라한조(Karakhanid dynasty)의 도읍인 발라사군(Balasagun)을 탈취하여 카라 기타이(Kara Kitay, 西遼)라 불리는 새로운 제국을 수립하고, 구르 칸(Gur Khan -'사해(四海)의 군주'라는 의미이다.)이라는 왕명을 사용하였다.

구르 칸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 주변 여러 지역을 침공하여 제국의 세력을 트랜스옥시아나(Transoxiana)까지 확장하였다. 카라 기타이 제국은 1212년, 징기즈칸(Genghis Khan)에 의하여 서쪽으로 밀려오는 나이만(Naiman)의 추장인 쿠츨륵(Kuchluq)에게 패하고, 콰레즘의 무함메드 칸에게도 제국의 큰 부분을 빼앗김으로 제국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거란은 역사속에서 중국에 큰 흔적을 남겼는데, 중국의 호칭이 거란의 이름으로 서양(西洋)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영어명은 Cathay 이고, 러시아에서는 Kitay(Китай)로 중국을 칭한다.



이후 762년에는 위그르의 카간 뵈귀(Bögü)가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는 등, 마니교는 위그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유목 민족 최초로 집단적으로 정착민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위그르의 정착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위그르인들은 정착을 위해 스텝의 평야 지대로 이동하게 되었고, 중앙 아시아 유목 민족 최초로 성곽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목 민족의 특성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군사적으로도 그 활력이 약해진 위그르 제국은 840년 키르기즈(Kyrgyz)위그르를 멸망시킨 키르기즈(Kyrgyz)는 강력한 부족 연맹이었으나, 다른 민족들과 같은 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목 민족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도시와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러나 마니교의 영향력은 단순히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마니교의 영향은 도시화와 정착화를 촉진시켰으며, 소그드인을 거쳐 중앙 아시아에 문자를 제공했다. 그 결과 위그르인들은 스텝 민족 최초로 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패망한 위그르는 다시 다양한 씨족 연맹으로 분열되어 소왕국들을 이루며 명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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