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아시아로의 이주 후로부터 1953년까지, 중앙 아시아 지역에 흩어진 한인들은 거주와 이전의 자유를 제한당하였고, 마치 집단적인 죄수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한인 억압 정책에 대한 소련 정부의 공식적 철회와 한인들의 복권은 1989년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중앙 아시아 지역에 정착한 한인들은 특유의 근면성과 개척 정신, 그리고 영농 방법의 개발로 인하여 모범적인 콜호즈(Колхоз, 집단 농장)들을 만들어 내었고, 뽈리따젤(Политотдел) 콜호즈, 김병화(Ким Пен Хва) 콜호즈, 북극성(Полярная Звезда) 콜호즈, 제 3 인터네셔널(Третий Интернационал) 콜호즈등은 중앙 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전 소련 연방의 주목을 받는 콜호즈가 되었다.

한인들이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이후로는 소련내 거주 한인들과 모국인 조선과의 접촉은 차츰 차단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은 여행에 제한을 받고 있었으므로 조선으로 갈 수 없었고, 소련은 곧 독일과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후, 중앙 아시아 지역의 한인들이 다시 모국과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은 한반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나서였다.  사회주의 이념을 먼저 배우고, 또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많은 재소 한인들이 북한으로 들어와서 북한 정권 수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북한 정권 초기에 이들의 기여는 절대적이었으나, 스탈린(Сталин) 사망 이후에 소련에서 후르시초프의 개혁 운동이 일어나면서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고, 이 시기에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돌아온 한인들도 대부분 숙청되었고, 그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된 경우도 상당수에 달했다.  특히 냉전의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대한민국과 소련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냉담한 관계를 유지하여 중앙 아시아의 한인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낯선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하여 소련의 한인들은 대한민국과의 본격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간의 이미지를 개선하게 된다.  이 때로부터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급진전하여 1989년 12월, 상호간에 영사처를 교환하기로 합의하였고, 1990년 9월 30일, 대한민국과 소련은 대사급의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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