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와 한민족과의 관련성은 한반도가 3개의 실크로드인 초원로(草原路), 오아시스로(Oasis路), 남해로(南海路) 중 가장 기본적인 실크로드인 오아시스로의 동단(東端)이고, 이 오아시스로가 중앙 아시아의 도시들인 타쉬켄트(Ташкент), 사마르칸드(Самарканд), 부하라(Бухара) 등 여러 오아시스 도시들과 터키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지나 로마(Rome)로 연결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밀접한 역사성을 설명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알타이 제(諸)민족과 한민족과의 관계는 매우 깊다.  특히 투르크족, 만주 퉁그스족과의 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에 관한 최근의 연구 결과들은 이들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단순히 우리 한민족 단독으로 새워진 것이 아니고, 다른 알타이 민족들과 연합으로 세워졌음을 밝혀주고 있다.  전술한 대로 고대 한반도 국가들의 지도자 칭호, 도시, 국가명 등에 나타나는 투르크, 몽골, 만주 퉁그스어의 요소들은 한반도에서의 고대 국가 설립과 그 체제의 정비에 있어 다른 알타이 부족들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며,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앙 아시아 지역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한민족의 흔적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시 교외에 있는 옛 소그드(Sogd)사람들이 남겨놓은 아프라시압(Afrasiab) 궁전터에 있다.  7세기 후반의 사마르칸트의 왕 왈프만의 궁전의 채색 벽화인 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13세기 징기스칸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는데, 이 성지(城址) 제 23지점 궁전 1호 서측 벽화에는 중앙 아시아 지역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두 인물이 그려져 있다.  그들은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황색 상의에 고(袴, 바지)를 입고, 환두대도(環頭大刀)를 패용하고 공수(拱手)한 채 서있는데, 두 인물의 인물상과 패용물로 보아 이들이 고구려로부터 파견된 사절이라는 데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특히 저명한 고고학자인  알바움(L. I. Al'baum)은 이들이 한국 계통의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고구려(高句麗)나 발해(渤海)가 중국에 대항하여 전쟁을 할 때면, 고대 투르크족인 돌궐족과 함께 연합군을 이루어서 함께 싸웠다는 것은 6-7세기에 이르기까지 같은 알타이 민족으로서의 친근성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라가 한반도를 중국(唐)의 도움을 받아 통일하게 되고, 한반도에서 중국의 영향이 점점 커지게 되자, 한민족은 북쪽의 알타이족 형제들을 ‘오랑캐’라 부르게 되고, 중국의 적을 우리의 적으로 여기게 된다.  

고려 중엽, 투르크-몽골 연합 제국몽골 제국은 지도층 약 15%가 몽골인이고, 나머지 85%는 투르크족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학자들은 이 제국을 투르크-몽골 연합 제국이라 칭한다.  물론 15%의 몽골족이 주도하는 제국이기는 했지만, 그 기반이 되는 투르크족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졌다.이 중국을 무너뜨리고 한반도로 진격했을 때, 고려인들이 대항하자 투르크-몽골의 지도자들은 당황해 하며 “우리가 당신들을 중국의 지배 영향에서 해방시키려고 왔으니 당신들은 기뻐해야 할 터인데 왜 우리에 대항하느냐”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한민족은 중국의 책략으로 형제 종족인 알타이 민족들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지만, 그들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전(前)시대의 전통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투르크-몽골 연합 제국이 한반도를 지배하던 60년간, 그들은 다른 나라들을 통치할 때와는 다르게 고려인들을 후대했다.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의 역사서에는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回回)’나 무슬림을 일컫는 ‘회회인(回回人)’에 관한 기사가 간간이 눈에 띈다.  ‘고려사’(권 5· 6世家)에 의하면, 고려 초기인 1024년과 1025년에 100명씩 와서 진귀한 방물을 헌상했고, 1037년에 또다시 상인 보나합(保那합) 등이 상역차 개경에 와서 진귀한 물품을 바쳤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한꺼번에 100명씩이나 무리를 지어 찾아왔으니 범상치 않은 문명간의 만남이 아닐 수 없다.

투르크-몽골 연합 제국인 원(元)의 간섭 아래 있던 고려에는 무슬림의 왕래가 점점 많아졌고, 이에 따라 이슬람 문화의 전래가 두드러졌다.  중앙 아시아의 위구르-터키계로 추정되는 무슬림들은 몽골의 고려 침공시에는 몽골군의 일원으로서, 후일 원(元)의 지배 시대에는 몽골 관리, 역관, 서기, 시종무관 등의 직책을 가진 지배 세력, 혹은 침략 세력으로서 한반도에 유입, 정착하였다.  그들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거나, 왕비인 몽골 공주의 후원을 배경으로 큰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이들도 점차 고려 여인과의 결혼을 통하여 동화의 과정을 거쳐갔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1274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가 된 제국 공주의 시종으로 따라온 삼가(三哥)라는 회회인(回回人, Muslim)이다.  그의 부친인 경은 원(元)나라 세조(世祖)인 쿠빌라이(Qubilai)대(代)의 서기였는데, 삼가는 고려 여인과 결혼하여 고려에 귀화하였다.  그는 고려왕으로부터 장순룡(張舜龍)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벼슬이 장군에 이르렀다.  그는 현재 덕수장씨(德壽張氏)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앙 아시아의 위구르-터키계 출신의 무슬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1206년 몽골 제국의 창건과 더불어 몽골 제국 내에서 준 지배 집단을 형성한 위구르인들은, 고려가 몽골의 속국으로 전락한 후 상당수가 한반도에 진출하게 된다.  당시 몽골은 그들의 지배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고려에 빈번하게 왕래하면서, 위구르인 사신, 관리, 역관, 근위병, 시종무관 등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교역을 목적으로 한 위구르 상인 계층과 심지어는 영구 정착을 위한 개인 귀화자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의 유입은 이슬람교를 비롯한 중앙 아시아 지역의 여러 문화적 요소가 한반도에 널리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에 진출한 위구르인들은 대부분 이슬람교도인데, 고려사나 조선(朝鮮) 왕조(王朝) 실록(實錄) 등에는 회회인(回回人, Muslim)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들 회회인은 당시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아랍인이나 페르시아인보다는, 중앙 아시아의 투르크계 위구르인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또한 이들 중에는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인 성을 얻고, 훗날 조선 왕조를 개국시키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 위구르인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설장수(薛長水)를 들 수 있다.

위구르인들은 교역을 통해 국제 상인으로 치부(致富)할 수 있었고 고려의 지배층과 연계해서 그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었다.  고려말에 한반도에 진출했던 위구르인들의 특권적 입지는 조선조에서도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조선조에서는 사역원(司譯院)의 외국어 시험과목에 위구르어가 포함되었고, 공식 외국어로 위구르어가 교습되었으며, 세종(世宗)은 회회역법(回回曆法)을 얻어 그 원리를 깨우쳐 새로운 역법을 완비하였는데, 순태음력(純太陰曆)적인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말선초(麗末鮮初) 약 150년간 지속된 위구르인의 종교적, 민족적 일체성은 1427년 이질적인 습속 및 문화를 금한 조선 세종(世宗)의 칙령으로 붕괴되고 말았고, 이들은 서서히 조선 사회에 동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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