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21 10:47
고선지 군이 이끈 당나라 군대는 이곳 탈라스 평원에서 단 한 번 이슬람군에 패했지만 이후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영영 되찾지 못했다. 사진작가 정철훈
카슈가르에서 자동차의 FM 라디오를 켜면 중국어 방송보다 위구르어 방송이 더 많이 잡힌다. 내가 아는 유일한 위구르어는 샨샨(鄯善)의 사막 초입에서 만난 청년에게서 배운 ‘약시무시즈’.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라는데, ‘약심…’까지만 말을 꺼내도 위구르인들은 반색하며 좋아한다. 귀곡천계(貴鵠賤鷄)라 하여 먼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닭을 천하게 여긴다더니 가까운 중국인보다 먼 위구르인에게 더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리라. 둥근 지붕의 이슬람사원, 하얀 모자를 쓴 남자들, 위구르어로 적힌 간판들을 보면서 나는 새삼 여기가 중국의 서쪽 끝인가 하는 감회에 젖는다.
타클라마칸 사막이 끝나는 곳인 카슈가르, 거기서부터는 해발 7439m의 포베다 봉, 7134m의 레닌 봉 등 톈산산맥의 설산들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 사막을 건너 서역으로 나선 수많은 중국 장수도 이 설산 봉우리만큼은 넘어가지 못했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국경선이 그어지게 됐다.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한 변경의 길을 달려가는 동안, 160여㎞에 걸쳐 나무 하나 없는 불모의 벌거숭이 산들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산의 무서움을 알았다. 자연보다 무자비한 정복자는 없는 셈이다. 이 잔인한 정복자와의 승부에서 단 한 번이라도 이긴 중국의 무인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고구려 유민의 아들인 고선지(高仙芝)이리라.
고려인들의 콜호스(집단농장)인 북극성농장을 이끌며 소련 정부로부터 두 번이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는 김병화(작은 사진)를 기리는 박물관도 타슈켄트 인근에 있다. 교직을 은퇴하고 연금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태 에밀리아(73)씨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지도자 김병화의 업적을 설명하던 중 스탈린이 사망하던 1953년에 얼마나 울었는지 회상하다가 갑자기 자신은 이제 더는 스탈린에게 존칭을 쓰지 못하겠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왜 그 사람은 우리를 여기로 보냈을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일본 첩자 활동 방지 차원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됐다. 2주일 만에 도착한 곳은 나무도 없고, 곡식도 자라지 않는 갈대 숲. 거기서 땅굴을 파고 살면서 수로도 만들었으며, 벼도 심고 목화도 재배했다. 나중에는 방송국과 출판사와 극단도 꾸리며 자신들의 문화도 이어갔다.
아리랑요양원에서 만난 최이반씨는 올해 82세로 1931년생이다. 강제이주 당시에는 여섯 살 어린이. 조선말을 잊지 않았지만, 31년에 멈춰진 그의 조선말과 2013년을 살아가는 나의 한국어는 쉽게 통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자 그는 손을 갈퀴 모양으로 만들어 긁는 시늉을 하더니 막일을 했다고 대답했다. 소수민족이라 배우지 못해서 그런 일밖에 할 수 없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글자 읽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던 고선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고선지의 아버지가 서역까지 가게 된 것도 앞에서 말했다시피 고구려 회복 운동을 막으려는 강제이주 정책 때문이었으니까.
마찬가지로 나는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된 뒤 극장 수위로 여생을 마쳤다는 홍범도 장군의 마지막 나날을 생각하며 1200년 전, 안녹산의 반군을 막으려다가 모함을 당해 비참하게 죽어간 장군 고선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때로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계처럼 보인다. 새로운 땅 서역에서 자신의 포부를 떨치려다 이슬람 군에 의해 저지된 고선지의 꿈을 마침내 실현한 사람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빼앗기고 강제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고려인들이었으니까. 아이러니의 역사,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수많은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그 자잘한 톱니바퀴 움직임을 하나하나 이해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중앙 Sunday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아이디 | 추천 수 |
---|---|---|---|---|---|---|
330 | 카자흐스탄 종교개방과 퇴출의 과정 | 정근태 | 2013.08.01 | 3797 | eckc132 | 0 |
329 | 경북도-우즈백, 실크로드 협력시대 연다 | 정근태 | 2013.08.05 | 3537 | eckc132 | 0 |
» | 강제이주 고려인 보며 고선지·홍범도를 떠올리다 | 정근태 | 2013.08.21 | 4693 | eckc132 | 0 |
327 | 중앙아시아 4국, 수력발전소 놓고 '아전인수(我田引水)' 싸움 | 정근태 | 2013.08.30 | 3479 | eckc132 | 0 |
326 | 카자흐서 장기집권 나자르바예프 반대 기습시위 | 정근태 | 2013.09.02 | 4310 | eckc132 | 0 |
325 | 기회의 땅, 유라시아 `新실크로드` | 정근태 | 2013.09.16 | 3634 | eckc132 | 0 |
324 | 우즈베키스탄, 여름어린이 수련회 현장 단속 | 정근태 | 2013.09.18 | 3607 | eckc132 | 0 |
323 | 방사능 오염 땅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나 | 정근태 | 2013.09.30 | 7191 | eckc132 | 0 |
322 | 러시아 한국어 능통한 '난민들의 대변인' | 정근태 | 2013.10.06 | 4183 | eckc132 | 0 |
321 | 중앙아시아 ‘장기집권’ 행진의 끝은 언제쯤? | 정근태 | 2013.10.14 | 4232 | eckc132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