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같은 호수·만년설 펼쳐진 실크로드의 땅

그곳엔 바다 같은 호수와 만년설(萬年雪), 넓은 초원, 한국인과 꼭 닮은 외국인이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악호(湖) 이식쿨, 톈산(天山)산맥, 실크로드, 몽골 북쪽 바이칼호에 기원을 둔 나라, 키르기스스탄이다.
카자흐스탄 제1 경제도시 알마티공항을 떠난 지 5분, 비행기 아래 눈 모자를 뒤집어쓴 톈산산맥이 보였다. 키르기스에서 제일 크다는 마나스공항은 우리나라 시골 공항만하다. 버스로 30분을 가니 수도 비슈케크다.

▲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 인근의 알라아르차 국립공원. 톈산산맥 아랫도리 초원이 시작되는 지점에 마을이 있다. 만년설 녹은 계곡물이 매우 차갑다. / 강훈 기자키르기스 사람들에게 가볼 만한 곳을 물어보면 열이면 열 "이식쿨"이라는 대답이 나온다. 인구 550만명 가운데 한 해 200만명이 찾는다 하니 우리로 치면 설악산과 해운대를 합쳐놓은 그 이상이다.

비슈케크에서 승용차로 갈아타고 동쪽으로 내달렸다. 한국 1970년대 모습을 연상케 하는 시골 마을과 초원이 번갈아 나타난다. 풀밖에 없는 야트막한 언덕에선 소년이 양떼를 몬다.

놓아 기르는 말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다 차량 소음에 물끄러미 쳐다본다. 저 멀리 톈산산맥은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진다. 이따금씩 옛 소련때 지었다는 칙칙한 건물들이 만년설 풍경을 가로막는다.

이렇게 2시간 이상 달리니 지대가 점점 높아졌고, 계곡은 흙탕물로 변해갔다. 꼭대기 어딘가에 '천지'나 '백록담' 같은 호수가 나타날 기세다. 큰 고개를 넘어 완만한 내리막길을 5분 달렸을까 멀리 푸른빛이 반짝거린다.

남미 티티카카 호수 다음 가는 산악호수 이식쿨이다. 따뜻한 호수라는 뜻이다. 동서 길이 180㎞, 남북 폭이 58㎞, 둘레가 400㎞로 제주도 세배 면적이다. 한 바퀴 도는 데 승용차로 10시간 이상 걸린다.

깊은 곳 수심이 600m가 넘고 평균 수심이 278m이다. 물맛까지 짜다 보니 바다인지 호수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수면 아래 조약돌이 반짝거릴 정도로 투명하다. 호숫가엔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바다 없는 이 나라가 해수욕장이 부럽지 않은 이유다. 해발 1600m 고원지대에 있지만 바닥에서 뜨거운 온천수가 솟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옛 소련 해군이 비밀리에 어뢰 테스트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식쿨의 압권은 호수에서 바라보는 반대편 전경이다. 검푸른 호수 위로 톈산산맥 둔덕이 보이고 그 너머엔 만년설 봉우리가 기운차게 솟아 있다. 중앙아시아 스위스라는 별명이 결코 허명(虛名)이 아니다.

석양에 본 이스쿨 주변 초지엔 방목한 말과 양이 한가로이 거닌다. 카메라를 들고 초원으로 들어서는데 당나귀 모자(母子)가 졸졸 따라온다. 말을 찍으려 초점을 맞추면 어느새 다가와 큰 머리로 카메라를 툭툭 친다. 귀찮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 버럭 소리를 질렀더니 그제야 슬그머니 방향을 돌린다. 사진을 세방이나 찍어줬지만 당나귀 모자가 바라는 것은 다른 데 있었던 모양이다. 모처럼 만난 객(客)에게 욕만 얻은 꼴이다.

이식쿨 지역으로 고대(古代) 교역로 실크로드가 지나간다. 신라의 혜초 스님과 당나라 고승(高僧) 삼장법사가 인도에 갈 때 이곳을 거쳤다.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군 고선지가 서역(西域) 정벌에 나서면서 이곳을 지나갔다.

주변엔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연상케 하는 단층·협곡지대도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여러 색상의 단층, 높이 솟은 붉은색 바위, 그 아래 이식쿨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어우러져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수도 비슈케크에서 30분 거리인 알라아르차 국립공원에서도 만년설과 초원을 즐길 수 있다. 만년설을 바라보며 알프스 소녀 하이디처럼 초원에서 마음껏 뒹굴 수 있다. 트레킹 코스로 인기라고 한다.

도로변 휴게소에 들러 전통 음식인 '라그만'을 맛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걸쭉한 국물에 쇠고기와 굵은 국수가 들어있는 라그만은 조금 짜지만 육개장에 국수 말아 먹는 것 같다.

다른 손님들 얼굴 살펴보면 순간 여기가 '추풍령휴게소' 인가 착각할 수도 있다. 한국인과 비슷한 외모에 피부만 다소 검을 뿐이다. 쌍꺼풀 없는 눈에 광대뼈 나온 '친근한' 얼굴도 많다.

이 나라에는 우리와 닮은 키르기스인이 65%, 페르시아 계열의 우즈벡인이 15%, 러시아인이 10% 정도 산다.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에 위치한 키르기스는 '세계에서 가장 멀고 깊은 오지'라고 해서 '최심국(最深國)'이라고 부른다.

키르기스엔 아직도 '약탈혼' 풍습이 남아 있다. '파흐쉐니야 제브식'이라 불리는 이 풍습은 우리의 옛 '보쌈'에 해당한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강제로 차나 말에 태워 집으로 데려간다.

납치된 처녀는 처음엔 저항하지만 남자 집안 어른들의 설득에 못 이겨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물론 끝까지 저항하는 처녀는 수일 뒤 찾아온 친정 식구들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키르기스인문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엘리자(21)는 "좋아하는 여자인데 자신감이 없어 망설일 경우 친구나 친척의 도움을 받아 상대 여성을 납치하는 사례가 많다"며 "이를 악용한 범죄 때문에 사라지고 있는 풍습"이라고 했다.













-조선닷컴에서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