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서 펌)

1937년 가을. 불과 일주일의 말미를 주고 구소련은 20만명의 연해주 거주 고려인들을 가축운송용 화물차에 실어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내려 놓았다.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은 벌판에 움막을 짓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렇게 중앙아시아에 오게 된 고려인들은 각지로 흩어졌고 그 후손 40만여명이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독립국가에 살고 있다.

이들의 존재가 소련 안팎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당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2004년 2월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중국과 러시아 등에 거주하는 2백50만명의 한인 동포들이 ‘재외동포’의 지위를 획득해 미국, 일본 등의 재외동포와 거의 같은 혜택과 법적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자유왕래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을 ‘부모 한쪽 또는 조부모의 한쪽이 한국국적을 보유했던 자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로 제한하고 있다. 이 규정을 따를 경우 국내 호적제가 시행된 1922년 이전에 중국과 러시아 등으로 이주했거나 일제 치하의 호적부에 이름을 올리기를 거부했던 항일투사 등의 후손들은 법 적용을 받을 길이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키르기스스탄은 다양한 소수 민족이 어울려 사는 곳으로 중앙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릴 정도로 자연 경관이 뛰어나다. 인종차별도 중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적은 나라다. 그럼에도 이방인으로서 현재 키르기스스탄에 살고 있는 2만여명의 고려인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특히 그런 삶의 곤궁함을 평생에 걸쳐 털어내지 못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려인 2세 노인들이다. 고단한 삶을 사느라 자주 만나지 못하고 변변한 모임의 장소조차 없다. 사립학교의 강당을 빌리거나 야외에서 초라하게 만나고 있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그래도 ‘동백노인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고려인 3, 4세대들에게 장고와 춤과 예절 등 한국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일에 열심이다. 고려인에 대한 긍지를 잊고 사는 것은 물론 자신이 고려인이라는 사실조차 부담스러워하는 고려인 3, 4세대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 동백노인회원들이 가장 좋아하고 잊지 못하는 노래가 ‘아리랑’.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배운 노래지만 그들에게 아리랑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에 대한 한과 애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노래다. 지난 11일 ‘아리랑’의 애잔한 선율이 모처럼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쉬켁의 한 교외 공원에서 흘러나왔다. 키르기스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에게 가장 큰 민속행사인 단오 축제가 열린 것이다.


섭씨 40도가 넘는 후텁지근한 날이 연일 이어졌지만 이날따라 보슬비가 내려 무더위를 식혀 주고 있었다. 500여명의 고려인들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선 동백회 소속 노인들이 고려인 3, 4세대들에게 1년 동안 애써 가르친 풍물과 춤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고려인 4세대 어린이들의 태권도 시범도 있었다. 시범 도중에 간간이 실수도 했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박수 소리가 더 커졌다. 이어서 연분홍 치마에 붉은색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들의 전통무용 공연이 시작됐다. 희끗한 머리와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잡혀 있었지만 할머니들의 춤동작에서는 기품이 흘러 나왔다.

이날 새로 선출된 고려인협회 상 보리스 회장(55)은 “단오 행사를 통해 대외적으로 한민족의 위상을 알리고 대내적으로 현지 재외 동포간의 유대감을 결속하여 한국인의 명맥을 유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단오 행사에는 지금은 실권한 키르기스스탄의 아카예프 대통령이 참석해 한국 전통 문화에 감동하여 애정어린 관심과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행사장에는 생김새가 다른 벽안의 이방인들도 눈에 띄었다. 매년 단오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는 러시아계의 리나 할머니(66)는 “어릴적부터 고려인 마을에서 자라서 비록 얼굴색은 다르지만 고려인들의 문화에 익숙하다”며 고려인 할머니들과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행사 마지막은 ‘아리랑’ 합창으로 마무리됐다. 각 지역에서 모인 500여명 고려인들은 갈 수 없는 고향과 조국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담아 ‘아리랑’을 목청껏 불렀다. 손에 손을 맞잡은 고려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눈에는 어느새 폭포수처럼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척박한 땅,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서 140년이 넘는 유랑의 삶을 살면서도 절대 잊을 수 없었던 노래 ‘아리랑’. 언제까지 이 ‘아리랑’이 그들만의 노래로 불려져야 하는 걸까.


▲키르기스스탄 고려인을 돕는 사람들


다큐작가 윤덕호씨(59)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생활상을 취재해 다큐멘터리를 제작, 국내 방송사에 제공해왔다.(경향신문 매거진X 2002년 10월2일자 보도)


윤씨는 달력 제조업체인 진흥문화 박경진 회장의 도움을 받아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이 담긴 달력을 키르기스스탄 고려인 가정에 보내는 운동도 펼치고 있다. 동대문에서 한복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김경희씨를 비롯, 동대문시장 상인들도 지금까지 1,000여벌의 한복을 키르기스스탄 고려인들에게 전달해오고 있다. 이밖에 공안과 의원, 의료기기 생산업체인 비겐의료기, 국정홍보처, 고려인돕기운동본부 등도 해마다 꾸준히 고려인 돕기 운동에 나서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동백노인회 황의봉 고문(73)은 “멀리 떨어진 조국에서 해마다 잊지 않고 선물도 주고 관심을 가져주어서 다른 소수 민족들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며 고려인을 돕는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키르기스스탄|사진·글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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