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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이주 150년> 최초 정착지 지신허 마을


(연해주=연합뉴스) = 1864년(일부 전문가들은 1863년으로 주장) 두만강 국경을 건넜던 조선의 한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했던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지신허 마을이 있던 곳. '지신허 마을 옛터'란 제목의 비문에는 '1863년 함경도 농민 13세대가 두만강을 건너와 정착한 극동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이란 설명이 붙어 있다. 비석은 지난 2004년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맞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공연한 가수 서태지가 헌정한 것이다.



<※ 편집자주 = 2014년은 고려인이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가 정착한 지 150년이 되는 해입니다. 폭정과 가난을 피해 동토의 땅으로 이주한 선조들은 척박한 자연환경, 현지인의 멸시와 차별, 당국의 탄압과 강제이주, 분단과 냉전, 소비에트연방 해체 등 신산과 굴곡의 세월을 견뎌내며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연합뉴스 국제뉴스국과 한민족센터는 한인 러시아 이주 150주년을 앞두고 현지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러시아 이민사를 더듬어보고 현주소를 살펴보는 10편의 기획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서울=연합뉴스) 강성철 기자 =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의 저자 김호준 씨는 한국 근현대사 최초의 국외 이주인 러시아 한인 이주 150년의 역사를 '통사'(痛史)로 규정한다. 한마디로 아픈(痛) 역사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척박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의 150년 삶을 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간다.


정착 초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낯선 환경을 견뎌내야 하는 이방인의 삶. 먹고살 만하자 친인척을 두고온 고국은 일제 침탈로 국권을 잃었고, 러시아 제국 내 민족 차별도 심화해 갔다. 그 사이 한인들은 러시아인들로부터 '고려 사람'이라는 뜻의 '카레이치'로 불리고 있었다.


차별과 설움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을 벌이던 한인들은 일제의 앞잡이라는 누명을 쓰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하루아침에 허허벌판 중앙아시아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한민족의 핏속에 흐르는 은근과 끈기의 정신은 중앙아시아에서도 빛나 불모지를 옥토로 개간하는 것은 물론 다른 소수민족들의 본보기가 됐다. 해방 이후 고려인들은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다시 한번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2013년 외교부 집계에 따르면 현재 고려인은 러시아에 17만1천 명, 우즈베키스탄 17만1천 명, 카자흐스탄 10만5천 명, 키르기스스탄 1만7천 명, 우크라이나 1만2천 명, 투르크메니스탄 1천 명, 벨라루스 1천20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취업 등으로 한국에 들어온 고려인도 3만 명에 이르고 있다.


◇ 약소민족 설움 견디며 정착… 독립운동 무대로 탈바꿈


조선시대 한반도의 힘겨운 현실을 벗어나려고 대륙으로 이주한 선조는 중국 동북 3성 지역으로 넘어간 조선족과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고려인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한 갈래인 고려인의 연해주 정착 시기는 1863년경으로, 1902년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하와이에 건너가려고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 선조보다 39년이나 앞선다.


그러나 한인 13가구 60명이 연해주의 지신허(地新墟) 마을에 정착했다는 러시아 측의 공식기록은 이듬해인 9월 21일 나타난다. 이 기록을 근거로 전문가와 국내 단체들은 2014년을 러시아 한인 이주 150주년으로 정하고 대규모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배층의 수탈로 살기 어려워진 한인들은 신천지였던 연해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황무지를 개척해 곡물을 심고 조선에서 가져온 한우를 퍼뜨리는 등 농사를 지으며 정착해 나갔다. 인구가 늘고, 세력도 커졌다. 당시 지신허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에 러시아인(8천385명)보다 한인(1만137명)이 더 많이 살았다는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고려인 강제이주 역사는 1937년 이전에도 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게르만 김 카자흐스탄 국립대 교수는 "1880~1890년대에 러시아 중앙 문서를 보면 국경 지역인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을 비롯한 아시아 인종이 출신국의 첩자나 테러 분자가 될 것을 우려해 내륙으로 이주를 권고하고 유도했다고 나온다"며 "실제로 연해주에서 북쪽으로 1천㎞ 떨어진 블라고슬로비엔예에 고려인 2천 명이 모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해주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뜻에서 고려인들은 이곳을 '삼만리'라고 불렀다.


이런 한인사회의 성장은 러시아 토착민들의 견제 대상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는 꾸준히 이어져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하기 전까지는 20만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나라를 잃자 한인들의 눈과 귀는 고국으로 향했다. 안정된 정착을 기반으로 높은 교육을 받은 한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어섰고, 고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는 인사들의 정신적·물질적 버팀목이 됐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신흥학교 설립자 이동녕, 항일무장 투쟁의 영웅 홍범도, 대한제국 장군 출신의 혁명가 이동휘, 국사학자 신채호 등 연해주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고려인은 러시아 혁명 이후 1차대전에 러시아군으로 참전해 독일과 싸우기도 했다. 1919년 2월에는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에서 고려인 지도자들이 모여 임시정부 조직과 독립 선언 방안을 논의한 끝에 '대한국민의회'를 출범시켰는데 이는 3·1 운동 후 최초로 선포된 해외 임시정부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920년 4월 5일 항일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을 공격, 고려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수백 명을 체포하는가 하면 학교에 가두고 방화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4월 참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연해주에서 고려인의 항일운동은 오히려 더 거세게 타올랐다.


최재형의 손자인 발렌틴 최 러시아한국독립유공자후손협회 회장은 "당시 많은 고려인 독립운동가가 활약했다"며 "냉전시대 한국과 러시아의 교류가 단절된 탓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 아쉽다"고 토로했다.


◇ 강제이주 고통 속 근면·교육으로 성공…모국어 상실 아픔도


1937년 8월 21일 소련 정부는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로 의심된다며 강제이주 명령을 내린다. 군대를 동원해 9월 9일부터 11월까지 고려인 18만 명을 장장 5천~6천㎞ 떨어진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으로 내쫓은 것이다.


불과 1주일, 또는 2∼3일 전에 통보를 하는 바람에 제대로 준비도 못 하고 끌려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강제이주에 앞서 스탈린 비밀경찰은 고려인 지도자 2천500명을 체포·처형해 고려인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반사막지대와 갈대밭 지역에 내던져진 고려인들은 토굴을 파서 추위를 견디며 겨울을 났다. 누구의 도움 한번 받지 않고 황무지를 일구느라 많은 고려인이 쓰러져갔다. 당시의 숙청, 기근, 질병 등으로 최대 2만5천 명이 사망했다는 설도 나오고 있다.


이들은 국경 지역 이주 금지를 비롯해 입대 거부 등 차별 대우에도 시달렸다. 또 국가기관 취업 및 취학이 제한됐고, 정계 진출도 봉쇄된 것은 물론 민족학교도 폐쇄됐다. 고려말은 소수민족 언어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임영상 한국외대 교수는 "고려인 가운데 1935∼1938년생이 드문 이유는 강제이주를 겪으며 갓난아기들이 질병과 기아로 죽어나간 탓"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고려인은 좌절하지 않고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거듭했다. 황무지를 개간했고, 중앙아시아에 논농사를 전파했다.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 콜호스(집단농장)는 300만 평의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 소련 최고의 모범 농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 인구 30만 명의 고려인 사회는 총 201명의 '노동 영웅'을 배출했다. 이는 민족 구성원 비율로 봤을 때 단연 으뜸이었다.


고려인은 농사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 각 분야로 진출했다. 무엇보다 자녀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학자·교사·의사·건축가·엔지니어· 법률가·공무원 등 각종 전문 직종에 진출했다.


1989년에는 고려인의 도시 거주 비율이 85%에 달했다. 대학 진학률도 25%를 기록해 소련 내 140개 민족 중에 아르메니아인 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다. 강제이주 직후 80%에 달하던 농업인구는 12%로 줄고 도시 거주 중간 관리층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고려인은 그 대가로 모국어를 상실하고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져갔다.


임영상 교수는 "고려인이 뿌리를 잃지 않으며 러시아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노동 영웅과 대학 진학률을 유지해온 것은 '교육의 힘'이었다"며 "고려인은 어디를 가든 학교부터 지었고 부모가 못살아도 자식 교육 뒷바라지를 최우선으로 했다"고 설명했다.


◇ 소련 붕괴로 기로…또 고난 극복하고 오뚝이처럼 '우뚝'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는 고려인의 몰락을 가져왔다. 소련 시절 공용어인 러시아어만을 구사하던 고려인들은 신생 독립국들이 토착 민족어를 국가 공용어로 선포하면서 고급 전문직과 공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신분 추락을 감수하고 살 것인지 아니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곳으로 다시 이주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고, 대다수가 피땀으로 이룬 터전을 버리고 다시 살길을 찾아 떠났다.


다행히도 1993년 러시아연방 최고회의는 러시아 고려인의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강제이주의 탄압이 불법적이고 범죄였음을 인정했다.


신원이 회복된 고려인들은 독립국가연합지역(CIS)에서도 성공 가도를 달렸다. 카자흐스탄에는 1만2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가스피스키 그룹'의 유리 채 회장, 세계적인 구리 생산업체 '카작무스'의 사주로 23억 달러의 재산가인 블라디미르 김, 최대 건설사인 '쿠아트'의 잠 올레그 사장 등이 손꼽을 만하다.


러시아에서는 유통업, 은행업, 가전제품 판매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보유재산 4억6천만 달러로 러시아 부호 100위 안에 드는 은행가 이고리 김이 있다.


정계 진출도 활발하다. 1995년 러시아 하원에 유리 텐(한국명 정홍식), 발렌틴 최가 당선됐고 그 뒤를 2007년 류보미르 장이 이었다. 2011년에는 육군 소장 출신의 유리 엄, 유리 텐의 아들 세르게이 텐이 하원의원에 선출돼 활약 중이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고려인협회장인 로만 김이 소수민족 대표로 하원에서 활약 중이며, 유리 최 상원의원과 빅토르 최 하원의원도 계보를 잇는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1994∼2000년에 부총리를 역임한 빅토르 천, 상원의원을 역임한 베라 박 등이 있고 키르기스스탄에는 3선 의원인 로만 신이 있다.


임채완 전남대 한상문화연구단장은 '고려인의 인구 이동과 경제 환경'이란 연구서에서 "재이주와 정착 과정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고려인이 늘어났지만 기업가로 성장한 이들이 적지 않고 정치인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다"며 "고려인의 근면성과 끈기 그리고 교육열은 재외동포 가운데 으뜸"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주류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고려인과는 달리 빈민으로 추락하거나 새로운 터전을 찾아 대륙을 떠도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김진규 고려대 교수는 "소련 붕괴 후 고려인의 유랑은 러시아행 재이주와 역사적 조국인 한국으로의 인력 진출로 이어졌지만 지금도 많은 고려인이 어려운 처지에 살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 교수는 "코리안 드림을 품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노동 인력이 부족한 산업 현장에 투입한다면 서로 '윈윈'이 될 것"이라며 개방적인 출입국 정책을 주문했다.



-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12/24/0200000000AKR201312240950003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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