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이스탄불까지의 실크로드 구간 가운데 내가 주마간산 격이나마 풍정(風情)을 맛보게 된 곳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세 나라야. 이 나라들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스탄’은 우리말의 ‘땅’, 유럽어로는 ‘Land’에 해당해. ‘땅’과 ‘스탄’은 어원이 같다는 주장도 있어. 아득한 옛날 북방 드넓은 초원을 누비던 우리 조상들의 말소리에는 ‘스’ 같은 바람소리가 섞여 있었는지도 모르지.

중앙아시아에는 이들 나라 외에도 ‘스탄’이 들어가는 나라로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이 있고 이들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도 ‘스탄’ 돌림이긴 마찬가지지. ‘stan’ 돌림 국가와 도이칠란트, 네덜란드, 폴란드, 스위츨란드, 핀란드 등 ‘land’ 돌림 국가 중 어느 쪽이 많고 유명한지 비교해 보고 싶긴 하지만 나보다 더 궁금해할 사람에게 맡기겠어.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은 서로를 형제국으로 칭할 만큼 가깝고 국경을 바로 맞대고 있는 데다 언어까지 별 무리 없이 통한다고 해. 반면 우즈베키스탄은 두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긴 하지만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다소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군. 어느 우즈베키스탄 사람 말로는 시골서 온 칠십 먹은 자기 아버지가 생전 처음 만나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사람의 대화를 몇 시간 동안 듣더니 대충 뭔 말인지 알아듣겠다고 하더래.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사막과 스텝 지역을 2900㎞나 내달리고 있는 톈산산맥이 거대한 등뼈처럼 세 나라를 연결시켜 주고 있지. 최고봉 텡그리(7439m)를 비롯해 평균 해발고도 4000여m의 준봉에 쌓인 만년설이 녹은 물이 흘러내려 강을 이루고 날줄처럼 또 세 나라를 단단히 엮어 놓고 있어. 씨줄로 작용하고 있는 게 내가 알아볼 것들이지. 인심, 언어, 설화, 역사 같은 것들.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좀 더 인간에 본질적이고 친밀한 것들.

소비에트연방 시절 한 체제의 우산 살대처럼 엮여 있던 세 나라는 에너지, 식량, 공업 등을 분업화해 담당하고 있었지. 1991년 세 나라가 독립하면서 분업체계가 무너지고 각자 자급자족을 하려다 보니 서로 마찰음도 생기고 있어. 이를테면 독립 이전에 댐을 건설해서 전력을 생산하고 공짜로 전력을 나눠 주던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 후에 돈을 받고 전력을 수출하자 강의 발원지에 가까운 키르기스스탄에서 반발해 상류에 댐을 건설하고 있는 식이지. 그런가 하면 카자흐스탄이 우즈베키스탄에서 가까운 도시 침켄트에서 비누나 식용유 같은 생필품을 싸게 팔아 큰 수입을 올리자 우즈베키스탄에서 침켄트로 가는 고속도로를 막아버린 일도 있지. 이웃해 있다 보니 늘 서로를 의식하고 한 비탈의 나무들처럼 키재기 경쟁을 하게 마련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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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은 화학주기율표에 있는 모든 원소가 다 광물로 생산되고 있다고 할 정도로 다양한 천연자원에 석유와 천연가스를 생산하는 부국이고 키르기스스탄은 ‘아시아의 알프스’로 일컬어질 만큼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환경에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야. 그래서인지 ‘카자흐스탄은 나라가 부자이고 국민은 가난한데 키르기스스탄은 나라는 가난해도 국민은 부자다’라는 말을 키르기스스탄에서 들을 수 있었어. 그 자존심이라니.

우즈베키스탄은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고(2900만명) 역사와 문명의 유적이 화려하지. 농산물이 풍부하고 음식과 문화가 발달해 여행자가 볼 것도 맛볼 것도 많지. 석유와 천연가스, 금 등의 천연자원과 광물이 풍부하기도 하다는데 얼마나 매장되어 있는지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라대. ‘우리는 카자흐스탄처럼 자원이 많다고 사방에 자랑하지는 않는다. 아직 제대로 개발을 하려면 멀었다는 것만 알아두라’고 늠름하게 이야기하더라고.

실크로드는 크게 나누어 초원길, 오아시스길, 바닷길이 있어.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의 행로는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이 혼합되어 있는데 초원과 사막에 오아시스 도시가 밤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뿌려져 있는 형상이야. 연평균 강수량이 400㎜ 미만으로 적은 편이고 일조량이 엄청나게 많으며 밤낮의 기온 차이가 심하지. 이런 지역에서 생산되는 과일은 맛있고 당도가 높게 되어 있어. 특히 사과 말이야.

중앙아시아 세 나라에서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도시인 알마티였어. 알마티는 톈산산맥의 북쪽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가로지르는 오아시스 실크로드상의 가장 큰 도시야. 알마티의 원래 이름은 ‘알마아타’였는데 투르크어로 ‘사과+아버지(또는 아저씨:叔)’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하더군. 이 지역이 사과의 주산지가 아니고 오히려 남쪽의 톈산산맥 너머 키르기스스탄 이식쿨 호수 주변, 훨씬 서쪽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주에 사과가 훨씬 더 많이 나고 맛있는데 왜 하필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알 수 없었어. 알마티의 중앙시장에서 파는 사과도 우즈베키스탄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하는데 말이지.

사과는 구약성경의 창세기(創世記)에 등장했으니, 성경대로라면 세상이 만들어지고 나서 가장 먼저 출현한 과일이지. 사과는 인류가 약 1만년 전부터 정착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접붙이는 기술을 개발, 적용한 과목이야. 포도, 호두, 살구 같은 대개의 과수(果樹)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최초로 재배된 흔적이 남아 있어. 지금 우리가 먹는 사과의 원종은 유럽에서 6세기경에 실크로드를 통해 도입됐다고 하니 실크로드로 실크만 오간 건 아닌 거지.

실크는 보기는 예쁘지만 겨울에 추위를 막아주지는 못해. 그러니 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꾸미기 좋아하는 부자들이 많은 비잔틴 같은 대도시에 비단을 운송해서 팔았지. 오는 길에 보석이며 씨앗, 묘목도 가져왔을 것이고.

이런저런 값나가는 물건을 가지고 1만㎞가 넘는 먼 길을 가는 카라반(隊商)은 말과 낙타, 양 등 가축이 1만마리, 인원이 300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였다고 하더군. 내가 어릴 때 나고 자란 마을 다섯 개쯤이 한꺼번에 이동하는 거지. 등에 짐을 실은 낙타는 하루 이동거리가 불과 50리, 20㎞였다니 오가는 데 풀코스를 왕복하려면 3년이 넘게 걸렸겠지. 무슨 일이 없었겠어. 먹고 마시고 입고 벗고 자고 또 입고 씻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장사를 하고 친구를 사귀고 적과 싸우고. 실크로드 몇 번 왔다갔다 하면 인생이 끝났겠지.

기원전 138년, 중국의 한 무제는 구사일생으로 서역을 다녀온 장건을 통해 하루에 천리를 달리며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린다는 한혈마(汗血馬) 이야기를 듣고는 스스로의 기마부대를 무장시키기 위해서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 지방인 대완국(大碗國)에 가서 그 말을 가져오게 했다고 하지. 만리 사막길을 넘어온 한나라 원정군을 맞은 대완국 사람들은 그 말들을 성 안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한군(漢軍)이 단 한 명이라도 성벽을 넘어 들어오면 말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했어. 결국 한군은 말 수십마리를 얻어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 한혈마는 실제로 피가 섞인 땀을 흘리는 것은 아니래. 말이 땀을 흘릴 때에 말의 피부 아래에 기생하던 세균의 작용으로 땀이 붉게 염색되어 방울방울 흘러내린 것이라 하대. 세균의 존재를 알지 못하던 옛 사람들 눈에는 피땀을 흘려가며 달리기에 열중하는 명마로 보였겠지. 그러니 실크로드는 ‘말 길(Horse Road)’도 되는 셈이야.

중앙아시아 초원 카자흐, 키르기스, 우즈베크(나라 이름이 길다 보니 자꾸 줄여서 쓰게 돼) 세 나라의 언어는 우리말의 뿌리이기도 한 알타이어에 바탕을 둔 투르크어야. 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타지키스탄은 지금의 이란, 곧 페르시아어에 바탕을 둔 타지크어를 쓰고 있어. 이란에 가까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사마르칸트를 비롯해 여러 도시의 사람들이 타지크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고. 실크로드가 여러 가지로 나뉘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우즈베크어, 타지크어, 러시아어 등 기본적으로 서너 가지 언어를 쉽게 구사해. 실크로드는 ‘말(言語) 길’임이 분명해.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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