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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전도회 셋째날입니다.
어제 상담을 약속한 아가씨가 전도회 시작 시간 40분 전에 와서 상담을 했습니다.
신경적인 분분들을 이야기하는데, 제게 전문적인 지식들이 부족한 것이 한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위로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내일 좀 더 함께 상담하기로 했습니다.
전도회가 시작되는 시간, 오늘도 어제랑 비슷하게 약 60명의 회중을 모였습니다.
10 여명의 구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딸띄꾸르간의 두 교회 성도들만 해도 100여명이 됩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집회들에 늘 참석하는 이들은 이정도 숫자에 머무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항상 전도회에 임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하심이 느껴지고, 많이 이들로 교회가 가득 차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죠....
한국 교회에서도 선교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항상 풍성하고, 기적적인 역사하심이 잇따르고, 작은 투자로 큰 수확을 거두는 것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곳 뿐 아니라 어느 선교지에서도, 전도와 선교 활동이 항상 그럴 수는 없지요.
한국에 들려지는 풍성한, 은혜스러운 소식은, 사실 광야의 오랜 고독함과 힘든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맺어지는 것들입니다.
소식이 전해질 때는 광야의 이야기는 빠지고 열매의 이야기만 전해지기에 선교지가 매력적인 일들이 가득한 곳으로 여겨지지요.

기대의 절반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그 절반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겠지요.
이러한 집회로 유익을 얻는 몇몇 이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희망이니까요.

어제 저녁, 석탄으로 물을 데워서 목욕을 했습니다.
몇일 만에 느끼는 따뜻한 물의 만족감입니다.
그동안 손이 얼 것 같은 물로만 그저 꼭 필요한 부분만 씻다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이 또한 행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따스함을 집회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희는 지금 딸띄꾸르간 2교회에 머물고 있습니다.
집회는 1교회에서 하고, 숙식은 2교회에서 하고 있는 것이죠.
단독 주택의 일부분을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딸띄꾸르간 2교회에는 고려인 동포인 오가이 뷔켄치 세뮤오노비치 장로님이 교회의 지도자로 봉사하며 생활하고 계십니다.
오가이 뷔켄치 세뮤오노비치.
‘오가이’는 성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려인의 성이 ‘오가이’인가?
처음 고려인들이 이곳으로 강제 이주 되었을 때인 1937년,
소련군 관리들이 끌려온 이들을 등록하는 일을 했습니다.
한명 한명 앞에 세우고, 성, 이름, 생년월일... 등등 을 부르게 하고, 쉽게 말해서 호적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문제는 러시아 자모로는 한국의 성과 이름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씨와 ‘방’씨는 다 ‘반’으로(러시아어에 ‘ㅇ’ 받침이 없습니다.)
‘전’씨와 ‘천’씨는 다 ‘첸’으로(러시아어에 ‘ㅓ’ 가 없습니다.)
‘정’씨는 ‘뗀’으로(이게 제일 가까운 발음인가봅니다.)
뭐 이렇게 성들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한 가족 가운데도 다른 관리에게 등록할 때 관리가 그 자리에서 듣는 발음이 달라서 다른 표기를 해 버려 성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가이’는 뭔가?
원래는 ‘오’씨입니다.
러시아 관리가 묻습니다. 물론 러시아 말로... “성이 뭔가?”.
함경도 사투리로 대답합니다. “오가이지” 러시아인 통역이 말해 줍니다. “오가이”
이래서 ‘오’씨가 ‘오가이’씨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가이’(이), ‘세가이’(서) ‘환가이’(황) 등 새로운 성들이 탄생해 버졌지요.
‘뷔켄치’는 본인의 이름,
‘세뮤오노비치’는 ‘세뮤온’의 아들 이라는 뜻입니다.
각설하고.
뷔켄치 장로님은 현재 44세로 딸띄꾸르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트랙터 운전사였고, 어머니는 유치원 요리사였다고 합니다.
1984년에 카자흐 아가씨인 ‘꿀레나바 자오레 아베노브나’를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결혼할 무렵 그는 건출물들을 관리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가 재림교인들과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것은 그때였다고 합니다. 그 회사의 청소부들 중 몇몇 사람들이 재림교인이었는데, 이들은 하급 직원으로, 꿈이 가득한 뷔켄치에게 그다지 큰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1994년, 3월 미국에서 중앙 아시아 선교를 위해 카자흐스탄에 온 재림교회의 벤 전(전형원)목사의 전도회가 딸띄꾸르간에서 열렸는데, 그 집회에 부인 참석하기 시작했고, 그도 가끔씩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도회를 마치고 부인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으나 뷔켄치는 그저 가끔씩 참여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열심인 부인의 감화를 받은 그는 1995년에 딸띄꾸르간 교회의 목사님에게 침례를 받았습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나, 일자리를 잃게 되고, 그렇게 몇 년을 지내던 그는 1999년에 일자리를 소개받게 됩니다.
일자리가 없어서 오랫동안 실업상태에 있었는데, 한 친척이 철도 회사에 일자리를 소개하자, 그는 즉시 일하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안식일 문제로 마음에 고민이 있었지만, 점점 상황이 그를 어렵게 몰아갔고, 안식일을 지키기가 점점 어렵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안식일 문제 때문에 “내가 제대로 신앙 생활하지도 못하면서 교회의 녹명책에 이름이 있는 것이 부끄러우니 제명을 시켜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교회에서 제명을 당했습니다.
몇 년 후 그가 책임을 지는 위치에 까지 올라갔는데, 작업도중, 한 만취한 일꾼이 작업장에서 쓰러져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경찰들이 오고 여러 사람이 잡혀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때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약속했어요. 이 일이 잘 해결되면 내가 교회에 열심히 다니겠다고... 그러나 여러 주 후 이 문제들이 다 잘 해결 되었는데도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상황을 만들어서 내가 하나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 기회들을 주셨는데 내가 계속 거절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일들이 있고나서 2년여, 2005년 봄,
구 소련 적역에서는 마크 핀리의 위성 전도회가 열렸습니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전도회를 하고, 구 소련 전역에서 화면을 받아 전도회를 진행한 것입니다.
이 전도회에 참여한 그는 재침례를 받기로 결심했습니다.
친구인 강 겐나지와 함께 침례받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는 다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재침례를 받을 때는 정말로 큰 결심을 하고 받았어요. 이제는 다시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이죠”
그는 재침례를 받고 나서 철도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다시 몇 달 동안 안식일 문제로 실업 상태에 있던 그는 건축을 하는 팀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는 안식일에 쉬는 대신 일요일에 일을 하면서 이 건축 팀을 직접 운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사는 동안 정말로 큰 경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가 회복되기를 얼마나 바라시는지를 깨달았지요”

오가이 뷔켄치 세뮤오노비치. 그는 현재 딸띄꾸르간 2교회에서 거하면서 생업에 종사하고, 딸띄꾸르간 2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딸띄꾸르간 2 교회는 22명의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는 올해 장로로 선택되어 5월에 안수식을 할 예정입니다.

오늘 넷째 날
전도회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먼저 말씀을 전하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이 전도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뷔켄치를 회심시키시도록 기도해 주시고.
씨가 뿌려진 마음 마음마다에 결국은 그 씨가 싹이 트고 자라나 언젠가는 열매를 맺도록 기도해 주십시요.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게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사진 설명 : 뒤의 건물 = 딸띄꾸르간 2 교회,
앞줄 왼쪽으로부터 첫 번째 강 겐나지, 네 번째 오가이 뷔켄치, 다섯 번째 딸띄꾸르간 1교회 알렉산더 알렉산드로비치 목사님
뒷줄 왼쪽으로부터 세 번째 부인 꿀레나바 자오레 아베노브나, 일곱 번째 맏딸 알렉산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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