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타고 가는 아랍

2008.11.16 12:12

정근태 조회 수:5214 추천:32



다섯 살 사외라 말케르(사진左)는 엄마 손을 잡고 이슬람 성원에 왔다. 케밥 하나 들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던 이 꼬마 아가씨, 수선스럽다고 엄마에게 야단맞았다. 눈물 찔끔 흘리다 금세 다시 웃는 건 다디단 바클라바가 생각나서다. 집에 가는 길에 엄마가 새로 생긴 시리아식 디저트 가게에서 이 과자를 사줄 테니 말이다. 성원 앞 전자제품 가게에선 페즈(이슬람 남성용 모자)를 쓴 아저씨가 디지털 코란이 내장된 휴대전화를 고르고 있다. 거리에는 지글지글 익어가는 양고기의 향신료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린다. 상큼한 요구르트 소스 듬뿍 얹어 빵에 싸 먹는 고기 맛이 그만이다.

그런데 여기는 시리아가 아니다. 두바이도 아니다. 대한민국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이슬람 중앙성원 근처 거리다. 편의점 TV에선 원더걸스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춤을 추고, 가게 앞으론 히잡(이슬람 여성용 스카프)을 두르고 얼굴만 내놓은 여성들이 스쳐 지나간다.

week&이 서울 속의 이슬람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봤다. 매주 기도를 하러 오는 파키스탄 출신의 귀화 한국인 김성두씨를 만나봤다. 무뚝뚝해 뵈지만 알고 보면 상냥한 정육점 주인인 한국인 알리 김(68)씨의 얘기도 들어봤다. 골목 이곳저곳을 드나들며 그들의 음식을 맛봤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가까운' 중동이다. 여권·비행기표·비자 모두 필요 없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면 충분하다. 가지고 갈 것은 교통카드, 열린 마음과 모험심이다. 아랍어 인사말 하나 알고 가면 더 좋겠다. “앗 살람 알라이쿰 (당신에게 평화를).” 이 말을 들으면 모두들 환히 웃어줄 거다. 웰컴 투 이슬람 인 이태원.

글=전수진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서울 이태원 이슬람거리

 김성두씨는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봉고차에 여섯 살 난 아들을 태우고 의정부 집을 떠나 서울 이태원 이슬람 중앙성원으로 간다. 이슬람교의 주일인 금요일만큼은 성원에서 '아잔(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에 맞춰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게 그의 철칙이다. 금요일의 성원은 바깥마당까지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파란색 외교관 번호판을 단 벤츠를 타고 온 사람이나, 지하철을 타고 온 사람이나, 여행객이나 무슬림(이슬람교도)은 똑같이 기도한다. “알라 후 아크바르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여성들의 예배 공간은 2층이다. 빨간 양탄자를 밟고 올라가니 이집트 여성이 히잡을 두르고 기도하고 있다. 그 곁에 있는 이는 새벽 6시에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성원으로 달려왔다는 미국인 무슬림이다. 그는 “샌디에이고에서 이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지만 너무 어려웠다. 이곳의 마스지드(이슬람 성원) 근처에 이슬람 먹거리며 공동체가 있는 걸 보니 부럽다”고 말했다. 성원 옆에서 이슬람식 정육점을 하는 알리 김씨는 “30년간 이슬람을 믿다 보니 법도며 종교 의식을 지키려 모여 살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이슬람 거리는 서울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에서 가깝다. 3번 출구로 나와 소방서 맞은편 보광초등학교 벽을 따라 올라가면 우뚝 솟은 두 흰 탑이 보이고, 곧 중앙성원이 나온다. 걷다 보면 아랍어로 된 간판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슬람 식당·마트·전자제품점·여행사·서점 같은 가게들이다. 잔뜩 쌓아놓은 향신료와 코코넛, 아랍 및 파키스탄·방글라데시에서 수입해 온 과자 사이로 “얄라 얄라”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한국어의 '빨리 빨리'에 해당하는 아랍어란다.

'이슬람 거리'에서 '이슬람 특구'로

이슬람 중앙성원의 '이맘(예배 집전자)'인 이행래(71)씨는 “요즘엔 자고 나면 새로운 가게가 생기는 것 같다”며 동네가 눈에 띄게 달라진 건 2∼3년 전부터라고 말한다. 성원 근처뿐 아니라 이태원의 곳곳에도 이슬람 식당이 들어서고 있다. 입소문이 나며 '이슬람 탐방'을 오는 젊은이도 많아졌다. 친구들과 놀러 온 한 학생은 이슬람에 대해 알고 싶어 일부러 시간을 냈단다. 한 개에 1만원 하는 히잡을 만져보며 그는 “새로운 게 많고 음식도 맛있어 또 올 생각”이라고 했다.

'앗 살람 알라이쿰' 한마디면 모두가 친구

 서울 이태원에 세계의 맛이 모인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독 이슬람만이 거리를 형성한 이유는 뭘까. 이행래씨는 그 이유를 한국 내 무슬림 인구의 증가와 함께 이슬람교의 특성에서 찾았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은 가축을 도살·가공할 때 '할랄(halal)' 인증을 중요시 한다. '할랄'은 '허용된'이라는 뜻으로, 이 인증을 받으려면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지켜야 한다. 도살할 때 '비스밀라(신의 이름으로)'를 외우며, 급소를 순식간에 끊어 고통을 최소화하고, 피를 모두 제거해야 하는 게 그것이다. 이런 식재료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수퍼마켓과 식당이 자연스레 모여 거리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우딘(35) 사장의 가게는 최근 생긴 '할랄' 전문 마트로 성원 주변에선 네 번째다. 각종 향신료 및 쌀·렌즈콩·병아리콩에서부터 닭고기·양고기·치즈까지 다양한 상품을 갖추고 있다. 주변 식당들도 '할랄' 인증을 받은 재료를 쓴다는 표시가 선명하다. “이 표시가 없으면 이 근처에선 장사가 안 돼요. 러시아 식당마저도 '할랄' 표시를 해요”라고 우딘은 말한다. 마트에는 '할랄' 음식이 아니더라도 한 상자에 4000원 정도 하는 말린 대추야자, 한 봉지에 1000원인 이집트 콩과자 '바너풀 차나줄' 같은 이색 상품이 가득하다.

코란MP3에서 시리아식 디저트 '바클라바'까지

예배가 끝나면 거리는 상점을 드나드는 교인들로 북적인다. 지난 금요일 오후 만난 모하메드 하나피 빈 사이프(21)의 양손에는 검은 비닐봉투 가득 양고기·닭고기 등 1주일 동안 먹을 식재료가 들려있었다. “무겁지만 여기서 사는 게 안전하고, 무슬림 간의 유대감도 느낄 수 있어 좋다”는 그는 컴퓨터를 배우러 말레이시아에서 유학 온 대학생이다.


두 달 전 시리아식 디저트 '바클라바' 전문점인 '살람 베이커리'가 생겼다(인터뷰 참조). 본토 맛을 내려고 디저트 전문요리사를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모셔왔다. 터키인들이 즐기는 갓 구운 바게트를 단돈 1000원에 봉사 상품으로 팔고, 정통 시리아 식으로 달콤하게 구워낸 피스타치오 과자 '셰비아' 등을 100g당 3500원에 판다. 철저하게 '할랄' 재료만 넣었다고 강조한다. 걸쭉한 설탕 시럽에 담가 만든 피스타치오 페이스트리는 달콤하고 고소하다. “아랍인은 물론 미국·유럽인이 주요 고객이지만 요즘엔 터키와 아랍 지역에 다녀온 한국인들이 추억을 되살리려 많이 온다”는 게 주인의 얘기다.

베이커리 코앞에는 '살람닷컴'을 비롯해 통신·전자 제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살람닷컴'에선 코란이 디지털칩으로 내장돼 있는 휴대전화가 단연 인기다. 이슬람력에 따라 매일 달라지는 기도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준다. 코란을 MP3 파일로 내려받아주는 서비스도 해준다.

언덕을 조금 더 내려오면 국내 유일의 이슬람 서적 전문점이라는 '이슬라믹 북센터'도 있다. '진리로의 안내'라는 한글이 박힌 초록색 간판이 걸려있다. 아랍어뿐 아니라 한국어·영어로 된 책도 있다. 인도 출신의 무니르 아흐마드가 이슬람 서적에 목말라 하다 아예 서점을 냈다. 한국인에게 이슬람을 제대로 알리고 싶은 마음도 컸단다. “이슬람에 대해 오해하는 한국 분이 많아요. 문제는 이슬람에 대해 잘 알려 하지 않고 오해를 키운다는 거지요.” 이태원 언덕길은 이슬람 성원이 있어 경건하고, 아랍사람들이 있어 유쾌하다.

케밥, 물담배, 쿠스쿠스 … 낯설어 즐겁다

 한국에 있는 식당인데 한국어가 안 통한다. 한국인 직원이 있거나 영어가 통한다고 해도 뭘 시켜야 하는지 모르면 대략 난감. 이태원의 여러 아랍 음식점 얘기다. 식당 주인들은 한국말이 서툴러도 한국인과 친해지고 싶어한다. 제대로 된 아랍 음식을 한국인들과 나누고 싶은 희망도 크다.

아랍 음식과 한국인의 궁합은 어떨까. 인터컨티넨탈 호텔 주방이사인 폴 솅크는 “아랍 음식은 계피·큐민·사프란 등 향신료를 많이 써 처음엔 생경하겠지만 한번 맛 들이면 중독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바이 등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그가 자주 찾는 서울의 아랍 음식점은 이태원의 '페트라'다. 요르단 출신에 호주에서 MBA를 딴 야세르 가나옘(38)이 주인으로 '정통 아랍 요리'를 표방하며 아버지가 부쳐주는 향신료만 고집한다. 이태원소방서 근처엔 간이음식점 '페트라 슈와르마 팰리스'도 냈다.

그는 이슬람의 금기인 술을 음식과 함께 파는 다른 아랍 음식점이 못마땅하다. 그러나 이태원 호텔 근처의 모로코 음식점 '마라케시 나이트'의 주인이자 요리사인 리티 무스타파는 “한국에선 술을 같이 팔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된다”며 “음식만 제대로 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일축한다. 소방서 근처의 '알리바바'에서도 술을 내놓는다. 주한 이집트 대사관 직원이었던 칼리드 알리가 운영하며 정통 이집트 음식을 내세운다.

아랍 음식이 낯설다면 인도 음식을 함께 내는 '포린 레스토랑'에 가는 것도 괜찮겠다. 소방서 맞은편 '두바이 레스토랑'에선 다양한 아랍 지역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알제리 아가씨가 빵 등을 갖다 주면서 “디스 이즈 서비스(This is service)”라고 건네는 한국식 영어도 즐겁다. 아랍식 물담배인 시샤를 1만5000원 선에 즐길 수 있다.


거창한 음식점이 부담스럽다면 노점의 케밥집도 있다. 소방서 근처 '레바논 케밥집'의 요리사 모하메드 하산은 저녁 8시쯤 나와 그날의 고기를 다 팔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닭고기 케밥 하나에 3000원. 매니어라면 이화시장 골목의 터키식 케밥 전문점 '술탄'을 모를 리 없다. 터키에서 온 주인 오메르 일마즈는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 용사여서 어렸을 때부터 한국 얘기를 많이 들었단다. '할랄' 양고기·닭고기 모두 취급하며 매운맛 조절도 가능해 외국인이 많이 찾는다. 곳곳에 자리 잡은 케밥집은 이제 이태원의 대표적 길거리 음식이 됐다.

아랍 음식문화의 외연도 넓어지고 있다. 홍대 근처에는 시리아인이 직접 운영하는 '실크로드'(02-3142-6887)가 있다. 엄밀히 말해 아랍권은 아니지만 음식문화가 비슷한 이란 음식점도 생기고 있다. 이달 문을 연 방배동 카페골목 근처의 '아리아'(02-596-2843)와 이태원 이화시장 골목의 '페르시안 랜드' (02-797-7109)가 그들이다.

[week&CoverStory]
기사입력 2008-11-14 04:17 |최종수정2008-11-14 12:58  
[중앙일보 전수진.권혁재]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64 이란교회, 박해 가운데서 큰다 정근태 2009.04.07 4465 48
63 리비아, 배교자 구속 및 가혹행위 정근태 2009.03.15 4051 33
62 이집트, 종교다른 남녀간의 사랑이 살인 불러 정근태 2009.03.10 4371 36
61 아프간 여배우의 비극 file 정근태 2009.03.03 4511 35
60 말디브, 대통령 바뀌어도 신앙의 자유는 그대로 정근태 2009.02.26 3950 31
59 사우디 청년, 기독교 개종 혐의로 체포 정근태 2009.02.24 4026 45
58 파키스탄, 북서부 탈레반지역 사실상 포기 정근태 2009.02.17 3992 34
57 가자지구, 구호품 반입에 난항 정근태 2009.02.08 3698 18
56 파키스탄, 탈레반 세력들 학교들 공격 - 여성 교육 반대 정근태 2009.02.04 4022 27
55 카타르, 1,300 년 만에 교회가 세워지다 정근태 2008.12.23 4228 39
54 부시에 신발 던진 기자, 하루 아침새 '아랍 영웅' file 정근태 2008.12.17 4734 34
53 아프가니스탄, 등교하는 여학생에게 산성 액체 투척 정근태 2008.12.16 4030 37
52 사우디 ‘하지’ 행렬에 무슬림 200만 운집 정근태 2008.12.08 3778 35
51 이집트, 콥트교-이슬람 충돌로 콥트교인 50명 체포 정근태 2008.12.02 3818 36
50 파키스탄, 기독교 거주마을 강제 철거 정근태 2008.11.21 3818 41
» 지하철 타고 가는 아랍 file 정근태 2008.11.16 5214 32
48 알제리기독교인 3명, 억울한 신성모독혐의로 3년 형 가능성 정근태 2008.10.31 4043 37
47 라마단 종료 file 정근태 2008.09.29 4252 44
46 중국의 종교 갈등: 티베트족(族) 불교도와 훼이(Hui)족(族) 무슬림 file 정근태 2008.09.26 5595 35
45 LG전자, 코란 읽어주는 TV 출시 file 정근태 2008.09.21 4384 46

SITE LOG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