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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군이 이끈 당나라 군대는 이곳 탈라스 평원에서 단 한 번 이슬람군에 패했지만 이후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영영 되찾지 못했다. 사진작가 정철훈 

 

 

카슈가르에서 자동차의 FM 라디오를 켜면 중국어 방송보다 위구르어 방송이 더 많이 잡힌다. 내가 아는 유일한 위구르어는 샨샨(鄯善)의 사막 초입에서 만난 청년에게서 배운 ‘약시무시즈’. ‘안녕하세요?’라는 뜻이라는데, ‘약심…’까지만 말을 꺼내도 위구르인들은 반색하며 좋아한다. 귀곡천계(貴鵠賤鷄)라 하여 먼 고니를 귀하게 여기고 가까운 닭을 천하게 여긴다더니 가까운 중국인보다 먼 위구르인에게 더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리라. 둥근 지붕의 이슬람사원, 하얀 모자를 쓴 남자들, 위구르어로 적힌 간판들을 보면서 나는 새삼 여기가 중국의 서쪽 끝인가 하는 감회에 젖는다.

타클라마칸 사막이 끝나는 곳인 카슈가르, 거기서부터는 해발 7439m의 포베다 봉, 7134m의 레닌 봉 등 톈산산맥의 설산들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 사막을 건너 서역으로 나선 수많은 중국 장수도 이 설산 봉우리만큼은 넘어가지 못했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국경선이 그어지게 됐다.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한 변경의 길을 달려가는 동안, 160여㎞에 걸쳐 나무 하나 없는 불모의 벌거숭이 산들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산의 무서움을 알았다. 자연보다 무자비한 정복자는 없는 셈이다. 이 잔인한 정복자와의 승부에서 단 한 번이라도 이긴 중국의 무인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고구려 유민의 아들인 고선지(高仙芝)이리라.

고선지 군대, 해발 4694m 탄구령 넘어 진격
지금은 둔황(敦煌)시가 고선지의 출생지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의 고향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고구려가 멸망한 뒤, 유민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서쪽으로 와 하서군(河西軍)에서 근무한 아버지를 둔 사연이 있는 터라 그가 구자(쿠처), 언기(카라샤르), 우전, 소륵(카슈가르) 등 서역 4진에서 잔뼈가 굵었으리라는 것만은 틀림없으리라. 아버지처럼 군인의 길을 밟아가던 고선지는 747년 행영절도사로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토번의 영향권에 속하던 소발률 정벌에 나섰다. 『구당서』에는 이 행로가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고선지 부대는 안서(쿠처)에서 출발한 지 15일 만에 발환성(악수)에, 다시 10여 일을 더 가서 악비덕에, 다시 10여 일을 더 가서 소륵(카슈가르)에, 다시 20여 일을 더 가서 총령수착에, 다시 20여 일을 더 가서 파밀천에, 다시 20여 일을 더 가서 특륵만천에 들어섰는데, 이곳이 바로 오식닉국이다.”

여기서 말하는 오식닉국은 오늘날 타지키스탄에 있던 나라였다. 여기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고선지 군은 지금의 파키스탄 사르하드 지방에 있던 토번(티베트)의 요새 연운보를 함락한 뒤,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소발률로 진격했다. 이때 그들은 탄구령이라는 고개를 넘었는데, 그 높이가 해발 4694m다. 내가 이 해발 4694m를 이해한 건 중국과 키르기스스탄의 국경을 이어주는 해발 3752m의 토루갓 고개를 넘어갈 때였다. 정상을 몇 십m 앞두고 차량에 문제가 생겨 20m 남짓 견인줄에 묶인 차를 밀었는데 그만 숨이 턱 막혔던 것이다.

탄구령을 넘어가던 당군 중에도 나처럼 조금만 빨리 움직여도 숨이 막히는 병사가 많았으리라. 그런 점에서 군사를 이끈 고선지가 정벌한 건 이 힌두쿠시 산맥이지, 소발률은 그 결과물일 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 정벌 이후 중앙아시아 72개국이 당(唐)에 복속해 절도사인 그는 서역의 지배자로 자리 잡게 됐다. 이후 750년 제2차 서역 원정에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 지역을 점령하면서 그의 무운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타슈켄트에 있던 석국(石國)의 왕이 장안으로 끌려가 처형된 일을 계기로 당시 무서운 기세로 동로마제국, 이집트, 아프리카, 스페인 등을 함락시키던 아랍제국의 압바스 왕조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그게 751년, 그러니까 천축 순례를 마친 혜초가 안서도호부인 쿠처에 도착한 지 24년 뒤의 일이었다.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아랍과 중국, 양대 제국이 충돌한 곳은 탈라스 평원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탈라스라는 지명은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슈케크에서 서쪽으로 3000m급의 패스(통로) 두 곳을 지나면 나오는 초원지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의 풍토는 패스를 넘기 전의 지역과 사뭇 달라서 유목민들의 거처인 유르트와 양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기저기 산등성이에 자유롭게 방목된 말들이다. 기원전 2세기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10년 만에 돌아온 장건에게서 최고의 말들이 거기 있다는 얘기를 들은 한(漢) 무제가 그토록 구하고 싶어 했다던, 하늘이 내린 말 ‘한혈마(汗血馬)’의 후손들일지도 모를 일. 그런데 이 탈라스에 인근한 카자흐스탄 타라즈 주의 주도인 잠불 역시 5세기부터 탈라스로 알려져 있었다. 두 도시 모두 탈라스 강을 따라 형성됐기에 같은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의견은 분분하지만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고선지 군과 이슬람 군이 대회전을 벌인 곳은 잠불 근처로 보인다. 두 군대는 751년 7월 말 닷새에 걸쳐서 전쟁을 벌였는데, 당 연합군인 케르룩 군대가 이슬람 군에 동조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고선지 군은 패하고 말았다. 이때 고선지가 이끈 7만의 당군 중에서 포로로 잡힌 2만 명의 병사 중에는 다양한 종류의 기술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제지 기술자들. 그들은 물이 많아 대마와 아마를 재배하기에 적지인 사마르칸트에 제지 기술을 전수했다. 이 제지술이 서쪽으로 전해져 쿠텐베르크 혁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유럽에 르네상스를 꽃피웠는데, 이 모든 게 탈라스 전투 패배의 우연한 혹은 필연적 결과물이다.

고선지의 패배 이후 당은 톈산산맥 서쪽지역의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건 고선지만의 잘못이 아니라 755년부터 안녹산의 난이 벌어지면서 당으로서는 더 이상 설산 너머의 땅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란군에 넘어간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탈환에 이슬람 군의 도움을 청할 정도였으니 당의 다급한 처지를 이해할 만하다. 이후 다시 중국은 톈산산맥 서쪽으로 넘어갈 수 없었고, 이 지역은 이슬람문명권으로 들어가 오늘날에 이른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이 지역까지 찾아온 한민족이 없는 것일까?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내 한국어와 통하지 않는 고려인의 조선말
이번 방문에서 나는 그 질문의 해답이 될 사람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타슈켄트에서 동남쪽으로 3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리랑요양원에 입소한 44명의 고려인 노인들이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서 운영하는 이 요양원은 입소자들을 1937년 이전 출생자로 제한한다. 고려인들에게 1937년이라는 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하루아침에 자신들이 일군 연해주 땅에서 생면부지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해라는 것. 소련 정부의 결산보고서에는 총 17만1781명이 124개 객차를 나눠 타고 이주했다고 나와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으로는 유일하게 두 번이나 노력영웅이 된 김병화.

고려인들의 콜호스(집단농장)인 북극성농장을 이끌며 소련 정부로부터 두 번이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는 김병화(작은 사진)를 기리는 박물관도 타슈켄트 인근에 있다. 교직을 은퇴하고 연금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태 에밀리아(73)씨는 그들의 자랑스러운 지도자 김병화의 업적을 설명하던 중 스탈린이 사망하던 1953년에 얼마나 울었는지 회상하다가 갑자기 자신은 이제 더는 스탈린에게 존칭을 쓰지 못하겠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왜 그 사람은 우리를 여기로 보냈을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일본 첩자 활동 방지 차원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됐다. 2주일 만에 도착한 곳은 나무도 없고, 곡식도 자라지 않는 갈대 숲. 거기서 땅굴을 파고 살면서 수로도 만들었으며, 벼도 심고 목화도 재배했다. 나중에는 방송국과 출판사와 극단도 꾸리며 자신들의 문화도 이어갔다.

아리랑요양원에서 만난 최이반씨는 올해 82세로 1931년생이다. 강제이주 당시에는 여섯 살 어린이. 조선말을 잊지 않았지만, 31년에 멈춰진 그의 조선말과 2013년을 살아가는 나의 한국어는 쉽게 통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자 그는 손을 갈퀴 모양으로 만들어 긁는 시늉을 하더니 막일을 했다고 대답했다. 소수민족이라 배우지 못해서 그런 일밖에 할 수 없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글자 읽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던 고선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고선지의 아버지가 서역까지 가게 된 것도 앞에서 말했다시피 고구려 회복 운동을 막으려는 강제이주 정책 때문이었으니까.

마찬가지로 나는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된 뒤 극장 수위로 여생을 마쳤다는 홍범도 장군의 마지막 나날을 생각하며 1200년 전, 안녹산의 반군을 막으려다가 모함을 당해 비참하게 죽어간 장군 고선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때로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계처럼 보인다. 새로운 땅 서역에서 자신의 포부를 떨치려다 이슬람 군에 의해 저지된 고선지의 꿈을 마침내 실현한 사람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빼앗기고 강제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고려인들이었으니까. 아이러니의 역사,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수많은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그 자잘한 톱니바퀴 움직임을 하나하나 이해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중앙 Sunday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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