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제5회 시네마디지털 서울에 출품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살인 사건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살인을 자백한 용의자, 검사, 경찰서장, 부검의와 함께 짚차를 타고 밤새도록 시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카메라의 앵글은 살인 사건이나 희생자 시신의 발굴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는 전혀 관련없는, 마을사람들의 주고받는 말이나 쓸데없는 훈수와 간섭, 극히 개인적인 일상에 집중된다. 그 과정의 끝은 시신을 찾아서 병원에서 부검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 및 끝의 배경은 아나톨리아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고, 배경은 짚차로 밤새도록 달려야 하는, 나무 한 그루조차 없는 넓은 평원이다.

파묵칼레는, 영화의 시작 및 끝의 배경처럼 터키 중부 내륙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도시의 타락한 환경과 범죄로부터 부르주아를 분리하는 교외의 주거지역이 아니라 씨족부락과 같은 혈연공동체이다. 파묵칼레는, 마치 영화처럼 서로 피곤하게 살아가면서 서로 관찰하거나 쓸데없는 훈수나 간섭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일상을 그렇게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집성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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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회암층 위에서 바라본 터키 파묵칼레 마을>

 

 

목화(파묵)의 성(칼레)에서 여행자들은 눈처럼 하얀 밝게 빛나는 석회층으로 된 마을 뒷산과 그곳에 있는 히에라폴리스 외에 관심을 가질 만한 게 없다. 중앙아시아 유목민 시기부터 오스만 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로얄패밀리들이 유럽계 백인이나 카프카즈계(아시아계 백인종)의 혼혈이듯이, 파묵칼레 사람들은 자신들을 터키인이라고 하지 않고 투르크인이라고 부른다. 터키 여성에게 '너 정말 피부가 하얗다'라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듯이, 마을 뒷산의 목화처럼 하얀 성으로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혈연공동체에게 여행자는 찬사금을 바치고 스쳐 지나가는 키로(원래 쿠르드족 소년을 뜻하는 말이지만 시골 출신으로 불명예스럽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 무식한 사람을 뜻하는 매우 모욕적인 언사)일지 모른다.

그러나 파묵칼레의 마을 뒷산에 가로놓여 있는 석회층의 산은 여행자들을 자연의 품 속으로 껴안는다. 여행자들은, '장미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가시도 감내한다'는 터키 속담처럼 '비(유럽계) 백인 외국인'임을 받아들이면서 파묵칼레의 자연에 파묻힌다. 그 자연은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는 석회층과 이곳에서 흘러내리는 온천수로 형성된 작은 온천들이다. 여행자들은 맨발로 그 석회층의 온천을 지나서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히에라폴리스를 만나기 전까지 진정한 여행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 여행자들에게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춰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 류시화 역). 파묵칼레에서 진정한 여행은 석회언덕과 그 온천층을 지나서 히에라폴리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히에라폴리스는 석회언덕의 뒤편 산 전역이다. 12세기 셀주크 투르크가 점령하여 파묵칼레로 이름을 바꾸기 전 고대 그리스 페르가몬 왕조에서 기원 전 2세기에 건설한 도시이다. 그 건설 목적이 온천수를 이용한 질병의 치료와 휴양이었기에, 이곳은 국가적 축제의 장으로서 그 이름도 '거룩한 도시'라는 뜻이다. 고대 축제가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가적 행사였기 때문에 이곳에는 아폴로 신전을 중심으로 원형 극장, 치료와 휴양을 위한 대목욕탕(바실리카)과 공동묘지(네크로폴리스) 등이 건립되었다. 그 때의 유물들은, 로마 시대 대목욕탕을 바꾼 고고학 박물관에 3개의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고고학 박물관에서 이곳의 최대 행사가 디오니소스 축제였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에는 인구가 1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번창한 도시였기 때문에 이곳의 축제는 소박하고 예스러운 의식을 행하는 시골 디오니소스 축제가 아니라 축제 행렬과 연극을 공연하는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였을 것이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농산물의 풍작과 다산을 기원하는 행사였기에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는 겨울 밀의 추수 시기인 3, 4월에 열린다. 도시 디오니소스 축제에서는 비극이 공연된다. 비극은 지배계급들이 교만으로 인하여 죄를 짓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교만이 신의 명령과 경고를 거부하거나 사회적 규범을 깨뜨리는 열정이라면 지배계급들은 왕의 명령이나 경고를 거부하거나 사회적 규범을 깨뜨릴 때 감수해야 할 파멸을 미리 체득하는 것이다. 축제에 행렬로 참가하거나 공연을 보면서 즐긴다는 것은 사회적 금기에 대한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놀이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다시 금기에 묶여 버린다. 축제는 그들의 한계를 체득시키고 강제시키는 일이다.

현대 인류를 지칭하는 용어 호모 루덴스, 곧 놀이하는 인간은 어디에서 놀아야 하는 것인가? 법률이나 검열은 없을까? 미국 비정부기관이 프리덤 하우스가 야당 옹호 웹사이트를 고의 차단, 시사콘텐츠 삭제 압력, 블로거와 단순 네티즌까지 체포 등으로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나라로 터키와 한국을 지목했다. 호모 루덴스는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에서 놀이로 문화적 행동을 표현할 수 있을까?


# 담배, 소통의 도구가 되다

작은 시골 마을이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터키 내륙에서 지중해로 가는 관문인 데니즐리를 거쳐서 파묵칼레로 간다. 파묵칼레는 여행자들에게 잠시 머무르거나 스쳐가는 시골이다. 어디서 오든 여행자들은 데니즐리에서 일단 내려서 파묵칼레로 간다. 데니즐리로 가는 장거리 버스에서의 피곤함을 뒤로 하고 파묵칼레로 가는 미니버스를 타기 전, 여행자들은 한 잔의 커피를 마시거나 한 개비의 담배를 피우거나 혹은 가족 친지들과 짧은 통화를 한다. '한 잔의 커피, 혹은 한 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시간, 잠깐의 사적인 통화 등. 그런 것에서 우리는 삶의 에너지를 다시 얻어내곤 한다.'(문진영의 소설 '담배 한 개비의 시간')

흡연의 자유나라 터키에서 여행자에게 담배는 단순히 심심초가 아니다. 터키에서 장거리 버스가 휴게실에 정차할 때, 서둘러 먼저 내리는 사람들은 대체로 담배를 피운다. 이 순간 흡연자들은 담뱃불을 빌리면서 환경 오염 공범자가 된다. 더구나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라이터를 찾을 때, 우연히 옆에 앉은 사람이 담뱃불을 붙여 주면 친구가 되기도 한다. 휴게실에서 버스를 함께 탄 터키 노인에서 담뱃불을 붙여 주자 그 노인도 담배를 권하며 우연히 동행이 되었다. 같이 담배를 피우고 연기를 내뿜으면서 그 향으로 느낌도 나누어 가진다.

2010년 제 1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연된 '담배연기 속에 피는 사랑'과 같이 그 노인의 자리에 여성이 대신 앉아 있다면, 오직 담배를 피우는 순간에 찰나적 공동체를 이루면서 수다를 떠는 낭만적 사랑을 이루었을까? 여행의 순간 순간 가지는 공상을 담배 연기로 허공으로 날려 보내고, 담배의 향만으로도 느낌을 함께 하고 웃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한국인에게 바가지상술로 유명한 파묵칼레에서 너무 편하리라는 느낌이 온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을 뿐 더구나 더 심각한 오해의 도구가 될 수도 있으리라. 진실한 소통은 마음으로 느끼는 것, 그 느낌으로 맘을 여는 게 아닐까?

부산대 국어교육학과 교수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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